1949년 나는 다시 대구교구 관리국장으로 발령이 났다. 그러던 중 6ㆍ25사변이 발발해 북한과 서울등지에서 성직자ㆍ수도자ㆍ신학생 등 많은 사람들이 대구로 피난왔다. 그래서 주교관이 순식간에 피난민들이 머무는 여관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마땅히 대접할 것이 없이 무척 애를 태우던 중 마침 양조장하는 교우에게 막걸리를 부탁해서 우물 속에 담궈 두었다가 시원한 막걸리 한잔씩이나마 대접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날 새벽2시쯤 됐는데 교우군인 한명이 나를 찾아와서는 공산군이 대구 근처까지 밀려 내려왔다면서 빨리 부산으로 피난가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급히 그 교우군인과 함께 아직 날이 밝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것이 못돼 최덕홍 주교님께 알렸다.
그러자 최덕홍 주교님은 근처 바오로수녀회 수녀들과 고아들, 주교관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부산으로 피난시키고 주교관에는 나와 주교님 두사람만 남아 있었다.
공산군이 대구를 점령했을 사태를 대비해 영세ㆍ혼인문서 등 중요한 서류를 드럼통에 담아 땅에 묻어 숨겼다.
전쟁이 끝난 뒤 다시 교구청 업무를 원상회복하고 관리국장직을 맡고 있던 중 당시 프랑스에서 철학공부를 하고 있던 이히지노 신부(현재 부산교구소속)가「유학생후원회」를 조직한 귀 유학생을 보내달라고 요청해왔다. 유학생후원회는 이히지노 신부가 벨지움의 한 교수에게 한국의 많은 이들이 유학할 수 있도록 후원회조직을 제의한 후 3년동안의 많은 노력 끝에 후원회를 결성, 한국학생이 유학할 수 있는 길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 후 1차적으로 남자 6명 여자 1명을 초청한다는 편지가 왔다. 그러자 주교님은 유학생선발 임무를 나에게 맡겼는데 선발조건은 첫째 신심이 깊은 사람이어야 하고 둘째 유학 다녀와서 교회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는 사람 등의 몇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유학생을 선발하기란 무척 어려웠다. 마침내 최종적으로 돌아가신 故 이효상 선생ㆍ김달호 교수(경북대)ㆍ이태재 교수(경북산업대학) 등 남자 5명과 여자 1명은 선발했는데 나머지 한명은 선발하지 못했다. 시간이 급박하여 고민을 하다가 주교님께 찾아가서『저는 유학가면 안됩니까』하고 말씀드렸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허락했다. 이렇게해서 나는 벨지움에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유학생 선발이 마치자 나는 유학생 명단을 작성해 프랑스 이히지노 신부에게 보내고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로부터 며칠 후 교황대사가 있는 일본으로 답신이 왔다(당시 한국에는 교황대사가 없었다).
그런데 유학생 후원에서 프랑스까지의 교통편을 여자는 비행기로 나머지 6명은 비용이 가장 싼 배편을 마련하여 비행기표와 배표도 함께 보내왔다. 그때만해도 비행기 타는 사람이 무척 드물었고 비용도 매우 비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도 굉장히 고맙게 생각하면서 배를 타기 위해 일본으로 가서 일본교황대사로부터 표를 받았는데 선실로 1ㆍ2등실이 아닌 3등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3등실이 어느정도인지 몰랐기 때문에 그저 고맙다는 생각뿐이고 유학생각에 가슴이 설레이었다.
일본 요꼬하마에서 배를 탔는데 무척 큰배였다. 승객들이 배에 오르자 승무원들이 승객의 가방을 건네받고는 자리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도 그렇게 해주리라고 생각하고 기다렸는데 배표를 보자마자 완전히 푸대접이었다.
우리 일행은 할 수 없이 각자의 짐을 자신이 들고 3등실을 찾아 갔는데 배의 제일 밑바닥이 3등실이었다. 다시말해서 물속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우리는 실망하지 않고 지정된 자리로 갔는데 베게도 이불도 없었다. 그저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취침시간이 되면 갖다 주겠지 했는데 생각이 빗나가고 말았다. 3등실은 승객이 알아서 베게와 이불을 구해야만 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승무원이 칼ㆍ포크ㆍ접시를 갖다 주고는 프랑스까지 갈려면 32일이 소요되기 때문에 보관을 잘해라고 말하고는 가버렸다. 만일 분실하거나 접시가 깨어졌을 땐 반드시 보상을 해야 한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고….
[노사제의 회고] 제2대 마산교구장 장병화 주교 7.
6ㆍ25 발발로 중요서류 땅에 묻어
1954년 벨기에 루뱅대 유학
발행일1990-07-08 [제1712호,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