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계산본당 제2보좌생활 2년6개월만에 또 다시 1942년 경남 충무본당(현재 마산교구 태평본당)으로 발령이 났다.
이 곳에서도 일본경찰의 감시와 박해는 여전했다. 그 당시는 태평양전쟁(제2차세계대전)이 절정에 달하여 일본의 수탈과 정책이 극심할 때였다. 농산물과 철(鐵)붙이는 몽땅 징발당했을 뿐아니라 젊은 사람들은 징병이나 징용으로 전쟁터에 끌려 나가야만 했다. 이로인해 본당에서도 눈에 띄게 점점 빈자리가 많아졌다.
1년 남짓 재임한 충무에서도 매달 한번씩 신사참배를 해야 했는데 이미 교황청에서 신사참배가 이단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또 일본은 적성국(敵性國)인 외국인 성직자들에 대해 외부적 활동을 엄금하고 사목현지에도 있지 못하게 했다. 이로인해 서울교구 라리보 원(元) 주교가 사임하고 노기남 주교가 착좌하는 한편, 대구교구도 뭇세 주교(프랑스인)를 강제로 사임케 하고 후임엔 일본인 하야사까(早坂) 신부로 대치됐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나는 항상 신자들에게『우리 민족이 겪어야 할 수난의 길을 신앙인답게 잘 참고 견디어 나가야만이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수 있고, 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신자들을 위로ㆍ격려하기도 했다.
1년후 1943년 나는 다시 대구 성 유스띠노신학교로 발령이 났다. 신학교에서 나는 경리와 라틴어 교수를 담당했다.
그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라서 식량이 매우 부족했다. 그래서 식량을 배급하는 실정이었는데 배급식량으로는 학생을 모두가 배불리 먹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그저 끼니를 때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따라서 신학교 경리를 맡고 있던 나로서는 무척 고민도 많이 했다. 그래서 내가 계산동 보좌시절에 알고 지내던 정미소 하는 교우에게 식량을 공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만일 이 사실이 일본경찰에 들키게 되는 날에는 눈에 불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에 한밤중에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신학생들을 위해 쌀2가마니씩 갖다 주기도 했다.
또 신학교 주위 언덕에는 감나무를 많이 심어 가을에는 감이 주렁주렁 열렸는데 한번은 학생들을 모아 놓고 감1개씩 배급했다.『먹고싶은 만큼 실컷 먹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전체 학생들에게 1개씩이라도 먹게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식량도 부족했고 간식이라고는 구경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감1개의 배급도 학생들에게는 허기진 배를 채우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신학교건물이 강제로 징발됐다. 일본군대 병영소로 사용하기 위해서라면서 일정한 기한내에 건물을 비워줄 것을 강요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성유스티노신학교가 문을 닫게 되어 신학생들을 서울ㆍ원산신학교로 각각 분산해서 공부를 계속하게 했다.
신학교건물이 강제징발당해 그동안 사용하던 비품ㆍ책걸상 등을 지금의 대구대교구 주교관 뒤 언덕으로 옮겼는데 무슨 물건이 그렇게도 많은지 학생들과 함께 1주일동안 옮겨도 끝이나지 않을 정도였다.
신학교가 문을 닫자 나는 잠시 주교관에서 머물다가 다시 대구 남산본당으로 부임했다.
그런데 남산동은 나의 출신본당이기 때문에 나를 알고 있는 어른들도 많고해서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했지만 나의 염려와는 달리 교우들도 잘 따라 주었고 비록 일본의 박해가 심했지만 모두 일치단결해서 신앙을 지켰다.
남산본당에서도 예비자모집과 신자교육에 중점을 두었고 유치원을 개설, 운영하기도 했다.그러나 1년동안 열심히 예비자교리를 가르쳤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1년에 신영세자들은 불과 30여명에 그쳤다. 별다른 활동도 어려움도 없이 생활하던 중 드디어 8ㆍ15해방을 맞았다.
[노사제의 회고] 제2대 마산교구장 장병화 주교 6.
일 강제징용으로 신자수 격감
민족수난 극복위한 신앙인 자세 강조
발행일1990-07-01 [제1711호,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