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로 체포되어 간뒤 아무런 혐의없이 1시간만에 풀려나 다시 공소로 돌아오니까 공소신자들은 박수를 치면서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예정시간보다 늦게 판공성사를 주는데 그래도 못믿겠는지 형사가 계속 감시를 하고 있었다.
조금 기분이 언짢았지만 할 수 없이 계속 성사를 집행하는데 일본형사가 무슨 말을 주고 받는지 의심스럽다면서 내 옆에 바짝 붙어서 감시를 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일본형사를 향해『이것은 전교행사이고 절대비밀을 지켜야 하는 고백성사이기 때문에 옆에서 듣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고함을 치면서 밖으로 쫓아 보냈다.
그때는 교부금ㆍ주일헌금 등이 없던 때라 본당사정이 어려워 운영하는데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부식비 절감을 위해 성당 한모퉁이에 채소밭을 만들어 자급하기도 했다.
한편 하루 두번씩 관할지역인 김해까지 걸어가서 공소방문을 해야했는데 그나마 홍수가 나면 여러군데 길이 막혀 신자관리나 전교에도 무척 힘들었다.
만일 전교를 하다 일본경찰의 눈에 띄면 스파이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행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으며 공소방문이나 외출시에도 반드시 경찰에 신고를 해야 했고 돌아오는 시각까지 보고를 해야 했다.
또 가장 마음이 아팠던 일은 한달에 한번씩 강제적으로 신사참배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신사참배에 대해 일본 외무성에서는「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 전사(戰死)한 이들을 추모하는 것」이라하여 교황청에서도「일본 점령하에 있는 모든 가톨릭 신자들의 신사참배는 이단이 아니다」라고 해석하여 신사참배를 허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신사참배」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치명을 하더라도 신사참배만은 못한다」라고 각오를 했지만 관권(官權)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하기도 했다.
진영본당 재임 13개월동안 나는 문맹자퇴치와 민족혼을 불어넣기 위해 전임 정재석(요셉) 신부가 설립한 해성학원 운영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일본경찰 감시의 어려움 속에서도 30여명의 신영세자들을 배출해 내기도 했다.
일본의 압박 속에서도 교세확장 등으로 보람을 느끼며 열심히 일하던 중 40년 8월 또다시 대구 계산동본당 제2보좌로 발령이 났다.
이때부터 나에게는「병마개신부」라는 별명이 붙여지게 됐다.
즉 사목자가 공석중인 본당에 병마개로 막듯이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짧은 13개월동안의 진영본당생활이었지만 나의 첫 주임신부로서 나름대로 얻은 것은 신앙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성숙되어짐을 깊이 체험하게 됐다.
정들었던 진영본당을 떠나 대구 계산본당 제2보좌로 일했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기억으로는 그때 제1보좌였던 신바오로 신부는 상당히 현대적인 신사였는데 나는 그분을 무척 부러워하기도 했다.
계산본당 제2보좌시절엔 지금의 효성국민학교 자리에 있었던 해성보통학교에서 교리를 가르쳤으며 본당 예비자교리를 담당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보람되고 힘들었던 것은 고백성사 주는 것이었다.
보통 평일에도 많은 신자들이 고백성사를 보지만 토요일에는 오후2~4시, 5~7시까지 고백성사를 줄 정도로 상당히 많은 신자가 고백성사에 충실했다.
고백성사와 관련된 웃지못할, 그때로선 상상도 못할 사건이 종종 있었는데 그중 한가지를 기억에서 꺼집어낸다면 어떤 할머니 한분이 일주일이 멀다하고 매주 고백성사를 보러온 것이다.
지금도 이런 노인신자들이 있었지만 고백하는 죄목도 전혀 죄가 안되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이 노인의 고백을 듣고 있던 한 신부가 꾀를내어 보속을 2주일 동안 하도록 하고 2주일 후에 고백성사를 보도록 했다.
그런데 그 후 일주일이 지나자 그 노인이 또 고백성사를 보러왔다.
그래서『저번 주에 받은 보속을 다했습니까』했더니 아직 다하지는 못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매일 영성체하는데 고백성사를 보지 않고는 마음에 걸려서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다시 고백성사를 보러 왔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신부가 성을 내면서 야단을 치니까 이 노인이 대뜸「지랄한다」고 내뱉고는 다른 본당으로 옮겨 가버린 일도 있었다.
[노사제의 회고] 제2대 마산교구장 장병화 주교 5.
고백성사 감시한 형사에 호통
강제 신사참배 견디기 힘들어
발행일1990-06-24 [제1710호,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