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는 죄수가 아니고서는 젊은이들은 머리가 길었는데 신학생들은 반드시「죄수」 처럼 짧게 깍아야만 했다. 그래서 우리는『죄수도 아닌데 왜 머리를 짧게 깍아야만 하느냐』며 학교당국에 여러번 건의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다.
그래서 우리 동기생들은 학생때는 비록 실행에 옮기지 못했지만 사제품을 받고 신부가 된 후 머리를 길게 기르자고 다짐하고는 신부가 되자마자 이를 당장 실행에 옮겼다. 이 문제 때문에 첫 사목지였던 마산교구 문산본당 주임신부와의 관계가 순탄치 않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문산본당에 부임한뒤 동기생들과 약속했던대로 머리를 짧게 깍지 않고 일반청년들과 같이 머리를 멋지게 길었는데 아무런 말도없던 주임신부가 6개월이 지나자 언짢은 표정을 지으면서 간접적으로 언질을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시 유행하던 「하이카라(칼라)」 스타일을 계속 고집했다.
한번은 진주에 있는 동기신부를 방문하고 (물론 동기신부도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교구지정 이발소에가서 이발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본당신부와의 불편한 관계를 의식해 짧게 깍을려고 하다가 그전보다 더 멋진「헤어 스타일」로 만들어 문산으로 돌아왔다.
이 모습을 본 본당신부는 화만 벌컥 내고는 그 뒤론 말도 건네지 않고 식사도 같이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아랫사람이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냐고 물으니 머리를 가리키면서『세속정신이 꽉 박혀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왜 신부는 죄수처럼 머리를 짧게 깍아야만 합니까』하고 하나 하나 이론적으로 따지니까 본당신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후에도 나는 끝내 머리를 깍지 않고 길렀다. 이것을 보면 나의 고집도 상당히 센편이었던 것 같다.
평온하지 못하던 1년간의 보좌시절을 마치고 마산교구 진영본당으로 첫주임 신부로 발령을 받았다. 본당에 부임해서 첫미사 드리는데 신자가 겨우 30여명에 불과했다. 그것도 대부분이 노인ㆍ어린이였다.
한편으론 한심하고 딱해서 미사도중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주일미사 참례자가 3백여명에 달하던 문산본당에 비하면 비교가 되질 않았던 것이다.
진영본당에서는 우선 첫사업으로 예비자확보에 주력했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감시 때문에 이것도 쉽지 않았다. 당시엔 신자들은 모두「요시찰 인물」로서 모든 생활ㆍ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딜 다니려면 꼭 경찰서에 신고를 해야만 했다.
한번은 봄 판공성사를 주기위해 관할 공소를 방문했는데 일본경찰이 나보다 먼저 공소에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서에 신고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왔는지 의아했다.
내가 공소에 도착하자 마자 그들은 무조건 경찰서로 가자고 했다.「아닌 밤중에 홍두 깨」라는 말이 실감났다.
나는『아무런 잘못한 일도 없는데 왜 다짜고짜 잡아 가냐』고 따졌지만 그들은 막무가내로 일단 경찰서로 가서 이야기 하자고 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걱정하는 공소신자들에게『아무일도 없을테니 안심하라』고 당부하고 경찰서로 갔다.
나를 잡아온 이유는「프랑스 스파이」가 아니냐는 간단한 것이었다. 심무한 내용도「프랑스 신부중 아는 사람이 있느냐」「그들과 편지를 주고 받느냐」는 등이 었다.
그당시 일본은 프랑스 신부의 활동을 적극 규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 신부와는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나는 아무런 혐의없이 1시간 뒤에 쉽게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경찰서에 잡혀간 후 공소에서는『우리 신부님이 돌아가시게 됐다』면서 한바탕 야단이 났었다.
[노사제의 회고] 제2대 마산교구장 장병화 주교 4.
38년 문산본당서 사목활동 시작
「불 스파이」혐의로 일경에 체포되기도
발행일1990-06-17 [제1709호,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