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나는 하나』
5, 우리가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마태오와 루까가 사용한 말들은 요한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여러 말씀과 완전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그런 말씀 중 으뜸가는 것은 아버지와 당신과의 일치를 명확하게 지적하는 예수님의 단언입니다『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 30). 이 개념은 대사제의 기도(요한17)에서 반복되고 발전되며 특히 그분이 빠스카 사건들 가운데 일어날 당신의 떠남에 대비, 사도들을 준비시킬 때 이층방에서의 담화를 통해 그랬습니다.
『내가 가면 그분은…』
6, 바로 여기서 이 떠남에 비추어 예수께서는 성신의 신비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성신의 관계를 계시하는 저 말씀을 결정적으로 발설하십니다.『나는 아버지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내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이『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신』(요한 15, 26)으로 단언하시는 그성신의 오심을 사도들에게 알리기도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청하여』이 진리의 성신이 제자들에게 내려와『위로자』(요한14, 16 참조)로서 그들과 영원토록 머물게 하겠다고 덧붙이 십니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보장하십니다『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신』(요한14, 26 참조)『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 26참 조). 이 모든 것이 빠스카 사건들 중 그분의 떠남에 이어 수난과 부활을 통해 확인될 것이라고 예수께서는 결론지으십니다『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요한16, 7).
『그날이 오면…』
7,『그때가 되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예수께서 다시 선언하시면서 성신의 작용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의 신비가 완전히 명확 해질 것이라는 암시를 하셨습니다『나는 아버지안에 있고 또 아버지는 내안에 계신다』. 그러한 신비는『하느님의 숨은 일들을 통찰하시는 성신』(고린토전서2, 10 참조)에 의해서만 완전히 비춰질 수 있으며 하느님 생명의 일치는 위격들의 친교로 이루어 집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신자들과 교회와 관계되는 아들의 강생신비 역시 성신의 작용에 의해 밝혀집니다. 사실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그날이 오면(사도들이 진리의 영을 받게 되는) 너희는 내가 아버지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안에 있고 내가 너희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 20). 이런 이유 때문에 강생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됨의 기초이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신비의 바탕 입니다.
강생은 삼위의 업적
8、강생이 비록 직접 아들에 관계되긴하지만 한분이며 삼위이신 하느님의『업적』 (4차 라떼란 공의회)이라고 지적해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이미 주님의 잉태 고지 메시지에 의해 증명됩니다(루까1, 26~38참조). 더욱이 예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 으로『인간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시야』(현대세계의 사목헌장 24항에서 보듯이)? 아버지, 아들, 성신의 삼위안에 한 하느님의 내적 생명의 시야들을 고려하도록 제안하셨습니다. 끝으로 당신의 메시아 사명을 완수하신 후 예수께서는 부활후 40일째 되는날 당신 사도들을 떠나시면서 당신이 알리셨던 것을 낱낱이 완성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실상 그분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라』(마태오 28、19).
교회가 세상속에 복음화 사명을 시작하기전에 이 복음서를 마무리짓는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계시의 최고진리, 나누일 수 없는 성삼의 일치라는 최고진리를 교회에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계속해서 교회는 흠숭과 경탄으로 목소리를 높여 언제나 깊은 감도에 젖어 복음기자 요한과 소리맞춰 제4복음서 서언의 마지막 말씀을 읊습니다.『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요한 1,18). 마태오 복음서(1,23 참조)는 예언자를 따라 그것을 되풀이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요한의 서언에서 확인됩니다『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복음기자들의 언어는 정말 형태가 여럿이지만 표현되는 진리는 같습니다. 공관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특별한 긴장의 순간, 즉 태풍을 가라 앉힌때(마태오 14,27 마르고 6,50 요한 6,20)『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고 하십니다. 교회의 사도적 사명을 내다보고도『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셨듯이 (마태오 28,20).
우리의 신화(神化)
9、『나는 아버지께로 부터 나와서 세상에 왔다』(요한 16,28)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구원적이고 구원론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모든 복음기자들이 이현상을 나타 냅니다. 요한의 서언은 다음말로 그것을 표현합니다『그분을 맞아 들이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즉 하느님에 의해 낳음을 받을 가능성이 주어졌습니다(요한 1,12~13 참조).
이것이 신ㆍ인(神-人)의 계시된 실재와의 위기적 일치를 발견하는 모든 크리스찬 구원론의 중심진리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인간이 참으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서 ?정말 어떤 의미로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 있게된 것입니다. 교부들은 이 사실에 대한 명확한 의식을 이미 갖고 있었습니다.
이레네오 성인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는 단한분의 확실한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닮으라는 권고에서『그분이 지니신 엄청난 사랑을 통해 그분은 우리의 처지가 되시어 그로 인해서 우리에게 그분의 처지가 되는 기회를 주십니다』라고 설파했습니다(이단을 거슬러 V.praef. PG7、1120참 조).
이 진리는 하느님의 아들, 아버지의 말씀인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에 비추어 우리 크리스찬 생활의 구체적 표현을 알아내어 밝히 지적해주는 무한한 지평을 우리에게 열어줍니다.
[교황님이 가르치는 교리 - 나자렛 예수] 183. 성삼을 계시하시는 예수 (하)
발행일1990-06-17 [제1709호, 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