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남형제만 다섯명이였기 때문에 평소에 여동생이나 누나가 1명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런데 이웃에 나보다 2~3살이 적은 여자 한명이 70세가 넘은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는데 얼굴도 상당히 이뻤다. 우리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기 때문에 우리집에 자주 놀러왔고 어머니를 친어머니같이 여기면서 잘 지냈다.
그러다보니 방학중에는 자연히 대면하는 기회가 잦았고 몇마디 인사정도는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신학교 규칙에「여자와는 쳐다보지도 말고, 말도 하지말라」고 했기 때문에 나의 경우엔 이 규칙을 여러 번 위반한 셈이었다. 이런 일 때문에 나중에 차부제품을 받기전에 혼자서 벙어리 냉가슴 앓듯 많은 고민도 했고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차부제품을 받기 두달전에 본당신자들에게 공시한 뒤 품을 받을자격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신분조사(?)를 실시하는데 앞에서 말했던 이웃 아가씨 문제가 큰 걱정거리로 대두됐다. 그래서 거의 한달반 가량 걱정이 되어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 얼굴이 반쪽이어서 다른 사람이 볼 때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형편 없었다.
차부제품을 15일 정도 앞두고 교장신부와의 개인면담을 통해 적격여부를 결정했는데 마침 내차례가 되어 떨리는 마음으로 교장신부방으로 풀이 죽어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나를 본 교장신부는 웃는 얼굴로 대뜸 하는 말이『요셉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차부제품을 받아도 괜찮다』라고 했다.
그 순간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걱정이 교장신부의 그 한마디에 사라져 버려 기끔도 컸지만 괜한 쓸데없는 걱정을 했구나 싶어 안타깝기도 했다.
드디어 차부제품을 받던 날, 처음 입학할 당시 50명에서 7명만이 차부제품을 받게됐다. 대구대교구 주교좌인 계산성당에서 서품식이 있었는데 시종 축복속에 예식을 거행하던중 성인호칭기도때 제대앞에 엎드려 있던 나는 성인호칭 기도가 끝날 때 까지 계속 눈물이 흘러 흐르는 눈물을 감추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당시에는 차부제품만 받게되면 준성직자로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부제 서품후에는 매일「헛미사」라 하는 미사연습에 열중하는 등 사제가 되기 위한 막바지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차부제품 받기전 나에게 걱정을 안겨다 준「이웃 아가씨」는 나의 어머니의 권유로 영세했고 함께 모시고 있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대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입회하여 열심히 살았는데 10년전 메주공장 보일러가 터지는 사고로 인하여 안타깝게 사망했다.
그렇게 큰 문제없이 1938년 동기생 7명과 함께 사제품을 받고 마산교구 문산본당 보좌로 발령받아 부임, 사목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다시 대신학생시절을 돌이켜 보면 우리반은 운동(?)을 많이 하기로 유명했다.
다시말하자면 육체적인 운동이 아니라 우리 밑에반부터 서울 동성고등학교에서 공부하기로 한 것, 경주로 수학여행가고자 계획했던 일 등 학교당국에 수많은 건의를 했다는 뜻이다.
내가 신부가 된 후에도 계속 펼쳤던 운동은 짧게 깍은 머리를 길게 기르자는 거창한 운동이었다. 비록 신학생때는 감히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어도 사제가 된 후로는 용감하게 그리고 멋지게 머리를 길렀다.
[노사제의 회고] 제2대 마산교구장 장병화 주교 3.
이웃 아가씨 문제로 고민하기도
「머리 길게 기르기 운동」에 앞장
발행일1990-06-10 [제1708호,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