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학교입학에 대해 부모님은 영세한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적극 찬성이 없다. 그래서 별다른 문제없이 소지품 몇가지를 챙기고 그렇게 갈망하던 신학교(소신학교)에 가게 됐다.
처음 신학교생활을 무척 힘들었다. 규칙도 엄했지만 한국말을 주일ㆍ 공휴일ㆍ 목요일을 제외하고는 모두 라틴어로 해야 했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모할 지경이었다.
아침 기상시간은 5시30분、5시45분부터 묵상시간이었기 때문에 세수할시간은 15분밖에 되질않았다.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세면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고 밖에 있는 우물에 물이 얼어 얼음을 깨고 세수를 했다. 시간이 넉넉지 않아 세수를 하는둥 마는둥 하면서 묵상시간은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그때 겨울은 영하15도까지 내려가는 것이 보통이어서 세수할 때부터 몸이 얼기 시작했다. 물론 묵상하는 방에는 석탄으로 난방하더라도 그래도 얼었던 몸은 풀리지 않고 상당히 추웠다.
지금 생각해도 우스운 것은 미사시간에 신심이 없다고 할까 싶어서 손이시려 못견디면서도 항상 두손을 꼭 합장한 채로 미사에 참석했었다. 그래서 겨울에는 손발이 얼어 모두 동상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더군다나 아무리 추워도 내복입는 것은「사치」라고 하여 절대로 입지 못하게 해 솜옷 하나만으로 겨울을 지내야만 했다.
당시 소신학교에는 주로 라틴어를 중점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일반 고등학교와 같은 학과공부의 필요성을 느껴 교장신부에 여러 차례 건의한 결과 우리 밑반부터 서울 동성고등학교에 가서 공부하기도 했다.
당시 중ㆍ고등학생들은 모두 교복을 입었는데 신학생들은 두루마기가 교복이자 예복이었다.그래서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내려온 학생들도 두루마기를 꼭 입어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교복 위에 두루마기를 입고 모자까지 썼으니 그 모습을 상상해보면 「동ㆍ서양 합작품」으로 얼마나 볼품이 없었겠는가.
대신학생때 대구교구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부를 초청해서 교구사제들을 대상으로 두차례 피정을 실시한 적이 있었다. 이 피정이 끝난후 대신학생을 위해 「예수성심공경」에 대한 강연을 가졌었는데 한눈에 보아도 정말 성인과 같은 신부였다.
그런데 이 신부님이 신학생들을 위해 주교님께 하루 특별휴가를 요청, 하루 휴가를 얻었는데 많은 액수의 찬조금까지 희사했다.
그래서 우리는 의논끝에 지금까지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수학여행을 경주로 가기로 결정하고 교장신부에게 간절히 청했지만 수학여행을 가게되면 여자와 함께 기차를 탄다는 이유 때문에 단번에 거절당했다.
그런데 수학여행을 갈 수 없다는 소식이 학생들에게 전해지자 한껏 부풀었던 희망이 와르르 무너져 내려 낙심이 대단했다. 그래서 전체 학생이 수업을 거부하는 데모를 벌렸다. 그때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지만 수업을 거부하기까지 한 학생들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수업 거부 사실이 드망즈 주교님에게 알려지자 마침내 드망즈 주교님은 신학교에 와서 『너희들이 나와 신학교 교장신부에게 순명을 하지 않는다면 모두 퇴학시킬 것이고 또한 신학교도 폐교(閉校) 할 것이다』라고 엄중히 경고했다.
그러자 학생들은 「신부 될려고 신학교에 왔는데 수학여행 때문에 사제의 꿈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라면서 할수 없이 주교님과 교장신부에게 순명하기로 다짐하고 수업거부 이틀만에 다시 정상적으로 수업에 임했다.
[노사제의 회고] 제2대 마산교구장 장병화 주교 2.
3년 각고 끝에 신학교 입학
내복은 사치품으로 규정 절대 못입어
학교측 수학여행 반대로「데모」하기도
발행일1990-06-03 [제1707호,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