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고 노주교님이 귀국하신 때는 10월 6일, 국군과 UN군이 서울을 지나 평양으로 진격하자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성탄안에 이 전쟁이 아군의 승리로 끝난다며 미군들은 성탄을 고국에서 지낼 것이라고 발표까지 했다.
정부도 북한을 접수할 행정관을 임명해 놓고 있다는 소식에 천주교측에서도 이북의 교회 실태를 조사한 후 황해도 17개 본당을 황해도 출신 신부로 임명했고 평안도는 안주교님이 평양교구 신부들을 배정했다. 국군이 압록강 물을 퍼서 서울로 보냈다는 소식에 기뻐할 즈음 임지로 떠났던 신부ㆍ수녀ㆍ교우들이 줄을 이어 쫓겨왔다. 중공군이 참전했단다. 비참한 후퇴가 또 오려나….
12월 8일에는 군사령부로부터 『전세가 불리하니 종교계에서 먼저 피난 갈 사람은 열차를 이용하하』는 전갈이 왔다. 노주교님께서 12월 20일, 교구본부와 명동 혜화동 중림동본당 신부만 남고 모두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부 발표나 신문보다 천주교 동태를 더 주시하던 일반시민들은 절망이라 생각하고 앞을 다투어 서울을 빠져 나갔다.
거의 대부분이 피한 가운데 성탄 기분을 내려고 남은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트리와 구유도 만들고 했으나 20여명 정도 참석한 쓸쓸한 자정 대미사가 되고 말았다. 12월 말경, 합창대까지 떠나 보내고 나니 적막만이 맴 돌았다. 그래도 피난 못간 시민들에게 위안이 될까하여 성당 종은 계속 울렸다. 1월 3일 삼종을 치고 났을 때 미아리쪽에서 포성이 들린다며 경향신문사 한창우 사장이 짚차로 나를 데리러 왔다. 우리는 그길로 수원에 도착해 저녁을 먹는데 서울은 벌써 불바다가 됐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 곧바로 부산을 향해 달렸다. 부산에 도착한 후 1월 20일경, 만일을 위해 큰 배를 마련, 신학생들과 수도자들을 제주도로 보냈는데 나는 서울이 다시 수복될 경우 빨리 상경코자 제주도행을 포기했다.
2월 20일쯤 UN군이 영등포를 점령했다는 소식에 2~3일내에 서울 입성이 가능하겠다고 판단, 부산을 떠나 수원에 당도했다. 그러나 그 이상은 통행이 금지돼, 수원 북수동에 거처를 정하고 연락병 최석호 신부의 보고를 들으며 때를 기다렸다.
드디어 3월 16일 성지주일날 UN군이 서울을 완전 탈환했다는 말을 듣고 출발하여 마포나루를 거쳐 명동에 이르는 동안 80노인과 7세 가량의 어린이 한명을 만났을 뿐이다. 그만큼 서울은 폐허가 돼 있었다. 그날부터 성당 종을 다시 울리니 교우 뿐 아니라 개신교신자, 외교인들까지 명동성당으로 몰려들었다.
일주일이 지나 부활 대축일, 이날 첫 미사에는 함께 입성한 식구 12명 뿐이었고 둘째미사에는 시내에서 모인 교우가 12명 정도였으니 실제 서울에 남았던 교우는 불과 20여 명에 불과했으리라 짐작됐다.
차츰 전선이 북상디자 파주 의정부 동두천 연천 지역의 교우들이 피난도 못하고 신부를 기다리다 못해 몇몇이 서울로 나를 찾아와 발이 묶인 신자들의 고충을 하소연했다. 연구 끝에 미군에게 부탁하여 쓰리궈타를 하나 얻어 7명의 신부를 태우고 의정부쪽 7개 공소에 신부를 한명씩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만난 신부와 신자의 해후란 초면과 구면을 가릴 것 없었으나 밤을 새워가며 인민군과 중공군 치하에서의 고생담을 털어놨다. 다음날 아침 미사를 드리고 헤어지는데 울고 불고 야단이 낫다. 하지만 무정스레 떠날 수 밖에…. 다음으로 동대문 밖과 멀리 양평 무넘이와 조곡리 일대의 공소들을 사목하고 돌아왔다.
이렇게 명동의 10년 생활은 애게 큰 고뇌와 변모를 안겨주기도 했다. 전쟁의 상처로 굶주림에 허덕이는 세월도 있었으나 자유가 없던 공산치하 생활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에 명동을 떠나 강화도와 그외 사목지역에서의 활기 넘치는 얘기는 뒤로 하고 6ㆍ25 체험을 끝으로 막을 내리고자 한다.
그동안 나의 글을 게재해 준 신문사에 고마움을 표하며 독자 제위께 감사드리고 또한 당시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도록 격려해준 모든 분을 위해 기도한다. <끝>
[노사제의 회고] 수원교구 장금구 신부 21.
명동성당 재임시 많은 변화 체험
시민들, 정부보다 천주교 움직임 주시
발행일1990-05-13 [제1704호,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