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사변이 터지고 서울을 점령당하면서 교우들과 생사를 같이 하려던 우리의 노력은 끝내 수포로 돌아갔다. 교구청과 본당의 간판을 메고 사제관에서 교구청、 교구청에서 기숙사、기숙사에서 용산신학교로 전전하며 시내에 남은 신부, 교우들과 고락을 함께 하려 했으나 전세는 알 길이 없고 이름도 모르는 자칭 교우라는 공작대 대장의 말을 믿고 모든 조치를 서둘러 마치고 나는 너무 많이 알려진 관계로 시외 구산공소로 피신을 했으니 신자들에게 민망할 따름이었다.
구산이란 곳은 백년 전부터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숨어 살던 천연적인 피난처로 김안당 성인이 순교후에 묻혔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40여세대의 교우들이 살았는데 모두들 열심하여 서울에서 피신해온 신부 수녀 신학생 등 수십명의 뒷 바라지를 맡아 해줬다.
내가 도착했을 때도 최민순 신부와 신학생 7~8명이 있었고 전세를 몰라 몹시 궁금해 하던 차에 우리를 만나 기뻐했으나 우리도 아는게 없었다.
그래서 전라도 신학생 3명이 고향으로 가겠다는 것을 만류치 못하고 보냈는데 2명은 잡혀 죽고 1명은 지금도 사목중에 있는바 며칠만 기다렸어도 무사했을 것을…. 지금도 한으로 남아있다.
치안대장 이장도 교우인 구산에서의 20여일 피난 생활은 조용한 가운데 그들의 과잉보호로 오히려 하루에도 몇번씩 숨느라 분주했다.
9월 28일에는 국군이 서울을 탈환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격강이 천리라 건널길도 없도 십리밖에 있는 내무서에서는 구산 교우촌을 전멸시킨다고 벼르고 있다는 정보에 떨어야만 했다.
시내는 수복이 되어 교우들이 먼저 모여 신부들의 생사를 걱정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일각이 여삼추였다. 틈만 나면 나루터로 나가봤으나 정찰기가 빙빙 돌면서 배나 모래사장을 걷는 사람을 보면 신호를 보내어 포격을 가하니 꼼짝할 수 없었다. 하루가 10년같았다. 여기앉아서 공산당의 총에 죽으나 강을 건너다 포격에 맞아 죽으나 죽기는 매일반이니 가다 죽는 것이 더 보람 있다는 결론에 다음날 30일 이른아침、 세 신부는 배를 띄우고 출발했다.
얼마 못가니 정찰기가 우리 머리위를 빙빙 돈다. 긴장의 순간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신부임을 알려야 할텐데 십자가도 신부 의상인 칼라도 가진게 없으니 알릴 방법이 없었다.
할수 없이 몸을 뒤로 젖히고 십자를 계속 그었다.
조종사가 이 행돌을 보고 가톨릭 신자이길 믿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참으로 이광경을 목격했다면 비행기안에서 얼마나 배를 틀고 웃었을까、 상상을 하니 우리도 웃음이 절로 났다.
어쨌든 포탄은 터지지 않았다. 주님의 보호에 감사를 드리며 걸음을 재촉하여 달리는데 행인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구의동에 도착했을대 별안간 UN군찦차가 우리 앞으로 달려와서는 권총을 들이대고 상하로 움직인다. 우리는 『천주교 신부요』하고 말했으나 반응없이 계속 흔든다.
위기 일발、아마 엎드리라나 보다 하고 가방을 땅에 놓자 차에서 내려와 우리를 한줄로 세운 후 맨앞에 선 내 가슴에 권총을 겨눴다.
총알을 아끼려고 한반에 셋을 죽이려나 생각하니 정신이 앗찔해져 왔다. 다음순간 그는 우리들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떨려서 눈을 감다시피 한 우리에게 『좋은 사람들이군』하고 보내주었다. 10년감수를 하고 1Km쯤 걸어와 서 담배를 피우려는데 최민순 신부의 파이프와 담배 쌈지가 없어졌다. 최신부는 화가나서 『죽일 놈들』하며 욕을 했지만 그 병사는 이미 멀어진 뒤였다.
가까스로 명동에 도착、 신부들의 생사를 알아보니 숨었던 신부들은 모두 건재했지만 이재현 신부는 『죄없는 사람 잡아가랴』하고 신학교를 지키다가、 백남창 신부는 『교장신부도 피신을 안하는데 내가 어찌 피해?』하고、 정진구 신부는 인민병원의 직원증을 가졌다고 방심하다 9월 17일 납치됐단다. 그외에도 송경성、 조종국 등 회장 5~6명이 납치됐음을 알고는 비통한 마음에 기도마저 위안이 되지 안았다.
[노사제의 회고] 수원교구 장금구 신부 20.
구산공소서 20일간 피난생활
9.28 서울 수복후에도 계속 숨어지내
발행일1990-04-29 [제1702호,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