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줄 알았던 정치보위부를 무사히 다녀와 얼싸안고 울기도 잠시、앞으로의 일이 캄캄했다. 잡혀 죽거나 해산이 뻔하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사목을 할 것인가 제의 했더니 익살꾼 오기순 신부가 대뜸 『나는 땜장이가 되겠오. 솥 때우시오 외치며 아무 집이나 들어가 솥 때는 체하며 성사도 주고 전교도 할 수 있을게 아니오』한다. 정진구 신부도 『나도 같은 이유로 박물장수가 되겠오』하는데 부주교 이신부님은 처량하게 『나는 늙고 병들고 재간도 없으니 깡통 차고 거렁뱅이 밖에 할게 없군. 남의 집 방문은 이게 최고야、의심도 없고…』하셨다. 처음에는 웃고 떠들었지만 그것이 현실로 바뀔 수 있다는 생각에 모두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래도 이런 난관중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위로의 천사를 보내셨다.
7월 26일、공산당 서울시 당부의 고관으로 있는 강약수라는 사람을 만나게 됐는데 충남 아산 공세리 출신으로 중학생 때 사회주의 사상으로 옥살이를 한적이 있었으나 신부가 둘、수녀가 여럿 나오는 열심한 집안의 사람이어서 비록 공산당의 고관 자리에 있을 망정 설마 신앙이야 변했으랴 마음먹고 현재의 교회 참상을 얘기하고 도움을 청했더니 『그러면 선전부장을 만납시다』하며 자기가 다리를 놓겠다고 약속하고는 헤어졌다.
8월 1일 초조히 기다리던 그가 왔다. 나는 조종국 회장을 대동하고 옛 문리대 자리에서 선전부장을 만났는데 그는 매우 예의가 밝아 교우가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친절했다. 『선생님은 종교가이시니 궐기대회니 방송이니 성명서니 하는 것은 맞지 않으실 겁니다.
지금 남 북으로 갈라져 싸우는 저 군일들、다 우리 형제가 아닙니까? 불쌍한 저들을 위해 위문편지나 물품을 걷우어 보내 주시지요. 그리고 강선생을 통해서 저와 연락하며 일을 처리해주십시오』하며 수고가 많다는 인사까지 덧붙인다.
이 말 한마디가 강철 방패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여러번 경험했다. 예로 어느 기관 누가 와서 뭐라고 하든 『우리는 선전부장의 지시로….』하면 말 끝을 맺기도 전에『예 수고하십시오』하고는 가버렸다. 긴 이야기가 필요 없었다. 그래서 강약수씨를 만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려고 찾아갔더니 며칠전 대전에서 폭격에 죽었다는 비보만 듣고 왔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그분이 좀더 그 지위에 머물러 있었따면 교회가 큰 해를 입지 않았을 것을…. 하느님의 안배는 알 길이 없었다. 머리숙여 가도할 뿐.
8월 6일 드디어 명동 구내에서 쫓겨나고야 말았다. 이제는 어디로 갈까? 교구본부를 해산하고 말까? 어디든 간판을 걸자며 찾아간 곳이 용산 신학교 자리로、마지막 서울을 떠나기까지 이곳에서 20여일을 지냈다.
8월말경이 닥아오면서 아군의 폭격이 심해지자 공산당들의 초조한 빛이 역역한 가운데 횡포도 심해졌다. 8월28일 저녁 무렵、기독교 민주동맹 간부 2명이 찾아와서 당의 명령이라며 『이틀 후에 떠날 이번 연합 종교 시찰단에 천주교도 신부 5명을 보내시오』한다. 따라가면 죽음인데 어찌 나서겠는가.
그래서 『지난달 25일 성당을 모두 폐쇄시켜 연락이 두절된 상태인데 어찌 신부들을 모은단 말이요. 우린 나중에 더 많이 모여 시찰단을 구성 할테니 이번만은 참작해 주시오』하고 간청했더니 둘만이라도 참석하란다.『우리가 가면 선전부장과는 누가 연락을 취하며 일하오』하며 마지막 카드를 제시하여 화를 면했다.
이제는 끝장이다 싶어 다음날부터는 시내에 숨어 있는 사제 수녀 회장들을 방문하고 격려했다. 나는 9월 8일、고아원 방문중 정통한 정보를 듣게 됐다. 그곳 수녀가 말하길 9월 4일에 공작대 대장이 찾아와 이제는 교회 간부들을 빨리 피하라고 일러 주었는데 그 말에 반신반의 하는 우리를 또 찾아와 『나도 신자라 신부 수녀들을 살리려는데 왜 따르지 않느냐』며 책상을 치고 화를 냈단다.
우리는 그말을 믿고 급히 쪽지에 써서 피신할 것을 전 신부 수녀 회장들에게 전하고 교구 본부도 해산、오기순신부는 고아원에 남고 나와 윤공 희신부(현 광주대교구장)는 구산공소로 피신했다는데 후에 그 공작대장은 처형됐다고 한다.
[노사제의 회고] 수원교구 장금구 신부 19.
선전부장 도움으로 화 면해
공산군 감시 피해 땜장이 등으로 변장
발행일1990-04-22 [제1701호,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