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2일 토요일、 사령관으로부터 명일10시까지 교구청 성당、수녀원、고아원을 모두 비우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괴롭히지 않겠다던 저들이…. 성당만은 안된다고 사정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고아들은 어쩌란 말이냐고 하소연도 했다. 그러나 매정하게 묵정동에 큰 집을 마련했으니 그리로 가라고 할 뿐이다. 교구청 일은 동회에 가서 알아 보란다. 모두 모여 앞으로의 일을 의논했다. 언제고 해산될테니 이 기회에 해산하자는 신부도 있었으나 교회의 중심기관이 없어지면 교우들의 심적타격이 클 것을 감안、 어떻게라도 명동구내에서 교구청과 본당사무를 계속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라 하나 남은 여학교 기숙사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네 신부가 문을 닫아 걸고 교구청과 본당의 중요 서류를 밤을 새며 꾸려 놓았다.
다음날 10시 미사를 앞당겨 9시에 종을 쳤다. 평시와 달리 일찍 치는 종소리에 놀라 교우들이 달려왔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불안한 모습들이다. 공산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사를 시작했다.
『사랑하는 형제ㆍ자매 여러분、 이 성당이 건립된지 50여 성상(星霜)、우리는 이 성당안에서 영세, 견진,혼인성사 등과 매일 미사 때마다 성체를 영하며 전례생활을 해왔습니다. 이렇게 정든 성당을 잠시 군의 요구로 비워주게 된점、어찌 비통치 않겠습니까. 비록 육체는 떠난다 해도 마음까지 비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무소부재 하시니 개인의 마음은 물론 주님의 이름으로 여럿이 모여 기도하는 곳이면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러니 마음으로 하느님과 일치하며 이 전쟁이 하루 빨리 종식되어 이곳에서 재회의 기쁨으로 알렐루야를 부를 수 있도록 열심으로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하고 미사끝에 강복을 주는데 목이 메어 끝을 맺지 못하고 나와 교우들과 함께 모든 짐을 기숙사로 옮겼다. 그리고『교구청과 본당사무는 당분간 기숙사에서 보고 있습니다』하고 현수막을 벽에 걸었다. 그래서 기숙사에는 신부 5명、수녀 50여명、이북출신 기숙생 20여명이 합숙을 하게 됐는데 며칠후에는 공산당에서 보낸 학교책임자까지 함께 기거하게 돼 불안한 마음 가실 날이 없었다.
그런데 써붙인 간판을 보고 먼저 찾아온 사람은 교우들이 아니라 공산당이었다. 시당부, 정치보위부, 내무서원 등 쉴새 없이 찾아와서는 모든 신부들의 자수서를 써 내라, 방송을 하라, 궐기대회를 하라는 등 위협적인 태도로 자기들이 초안한 대로 시행하라고 명령했다.
거짓말 투성인 자수서에 가면으로라도 비양심적인 서명을 해야 옳은가? 모두들 고민 끝에 지연작전을 펴기로 했다.
주교님의 자수서는 부교구장 이신부의 이름으로 열거사항 전부『모른다』로 썼고 나머지 신부는 죄목에『신부생활 몇 년』이라고만 썼다.
궐기대회는 세 번 네 번 핑계를 대고 성명서도 내지않으니 저들도 화가 날대로 났다.
7월25일 시내 모든 본당이 점령되고 신부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날 궐기대회 문제로 서계원이란 자가 또 찾아왔다. 나는 딱잘라 거절했다. 『여보、당신들은 오늘 아침 모든 성당을 폐쇄해 놓고 어떻게 교우들을 모아 궐기대회를 한단 말이오』했더니 자기들은 몰랐다며 자수서를 요구했다. 네장을 주었더니『이게 자수서란 말이오』라고 화를 내며 갔다.오후3시경、이신부와 나를 연행하려고 세 명이 다시 왔다.이제 가면 못 올 것을 각오하고 오기순신부에게 사무인계를 해주고 신부、수녀、교우들과 눈물로 마지막이 될 지 모를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네 시간의 취조끝에 어인 일인지 저들은『잘 좀 협력해 달라』며 돌려보냈다. 저녁7시쯤 기숙사에 당도하니 모두들 저녘도 굶은 채 수심에 잠겨있다가 이번에는 서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이때만큼 한 마음 한 몸이 된 적이 없다고 생각된다.박해는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난관 때마다 주님은 일러주신 것 같다.
[노사제의 회고] 수원교구 장금구 신부 18.
주교 ㆍ 신부에「자수서」작성 강요
공산군 압력으로 성당 전 건물 압수돼
발행일1990-04-08 [제1699호,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