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이윤자 국장대우
버림없는 삶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분명히 있다. 결코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이 삶을 지표로 80평생을 살아온 사람 난사(蘭斯) 석주선 박사(石宙善ㆍ80세ㆍ마리아)가 바로 그 사람이다. 버리지 못하는 성격 아니 버리지 않는 타고난 성품이 오늘 그를 우리나라 민속학계의 거봉으로 우뚝서게 했다.
석주선 박사의 현재 공식직함은「석주선 기념 민속박물관장」.
그의 이름 석자를 딴 박물관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국민속학계에서 그가 이루어놓은 업적을 쉽사리 가늠해 볼 수가 있다.
단아한 커트머리와 한복이 무척 잘 어울리는 석 박사는 올해로 팔순. 그러나 학문을 사랑하여 그 학문을 완성시키기 위해 바쳐온 삶을 이야기할 때 그 눈빛은 소녀처럼 반짝인다.
팔순의 나이가 믿기지 않는 젊음과 정열이 그에겐 있다.
71년 회갑을 기해 이 세상에 나온「한국복식사」는 그가 23년간 흘린 땀과 눈물의 결정체였다. 그의 역저「한국복식사」로 우리는 잃어버릴 뻔 했던 우리 민속문화의 귀중한 부분、복식의 역사를 간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복식사」는 내가 심혈을 다 한 책이라 말할 수 있어요. 23년이란 산고를 딛고 태어난 책이니까요. 학교수업 외에는 도서관에서 문닫는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이해도 못하는 한문책을 펼쳐놓고 하루종일 한자를 썼어요. 그땐 하루 해가 왜 그렇게 짧던지』.
불모지 한국 복식계에 학문적 체계를 갖추고 이론을 정립한 것이 「한국 복식사」로 태어난 것처럼 그가 신들린 사람같이 모으고 수집한 민속자료 전부는 81년「석주선 기념 민속박물관」속에 되살아 날 수가 있었다.
76년 동덕여대 교수직을 정년으로 물러난 석 박사는 그가 생명처럼 아끼는 민속유물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는 임자를 만났던것. 바로 단국대학교 장충식 총장이었다. 당시까지 수집한 4천여점의 민속유물 가운데 정리가 완료된 3천3백60점은 완벽하게 갖추어진 전시실과 보관실에서 제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소장품 중 가장 오래된 의류는 1620년 광해군 부인 유씨의 청삼(靑衫). 이 밖에 중요민속문화재 제1호인 순조의 딸 덕온공주(1822~1844)의 「당의」(唐衣)와 제2호인 심동신(고종조)의「금관조복일습」을 비롯、흥선대원군의「자적용포」와「기린흉배」등이 보물급 소장품으로 꼽히고 있으며 모자류 머리장식ㆍ장신구ㆍ허리띠ㆍ흉배ㆍ병풍ㆍ부채 등 생활도구 등도 포함돼있다.
그는 광고안내문ㆍ헌 편지봉투ㆍ우표ㆍ선물꾸러미종이ㆍ끈 등등 아무것도 버리지 못한다.
버리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을 재생시켜 멋지게 활용하는 놀라운 재주가 있다. 천성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이 놀라운 재주는 그가 양재공부를 하고 의류에 관심을 갖게된 때 이미 굳어졌고 우리의 복식사를 체계적인 학문으로 완성하는 디딤돌 역할을 했다.
젊음을 몽땅 바치고 그것도 모자라 평생을 바친 복식연구에 그가 발디딘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11년 평양에서 유복한 집안의 3남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난 그가 동경유학길에 오른 것은 1938년이었다. 당시 동경제대에서 나비에 관한 연구발표회를 가진 둘째오빠 석주명을 따라 동경으로 구경간 것이 곧바로 유학길이 되었다.
빨리 공부해서 빨리 사회에 나가 봉사하고 싶어 선택한 「양재」는 결코 그에게 빠른 삶을 허용하지 않았다. 40년、전문대학에 해당하는 일본 고등양재학원에 입학한 날로부터 그는 50여년간 하루도 쉴날이 없는 연구 인생을 살게됐고 그 연구는 아직도 끝을 보이지 않고있기 때문이다.
모든 면에서 일본인을 앞지르고 뛰어났던 오직 단 한명의 이 한국여학생은 졸업과 동시에 모교 교사 자리를 차지、50여년에 걸친「훈장생활」의 문을 열게 된다.
해방과 더불어 귀국、「국립과학박물관」공예학 연구실장으로 첫 발을 내딛으면서 그는 이 민족의 가장 친숙한 부분、복식분야와 끊을 수 없는 연을 맺게 된다.「몸에 맞는 의복을 찾아입기운동」은 그가 이 땅에서 처음 벌린 캠페인이었다. 아이들옷이 따로 없었던 당시 우리의 의ㆍ식ㆍ주는 설명이 필요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박물관과 거리가 가까웠던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의상학을 가르치던 그는 한줄의 역사라도「…일것이다가 아니라…이다」라고 자신있게 전달하는 선생이 되고 싶었다.『문헌을 뒷받침하는 유물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어요. 한국복식사라는 미개척분야의 학문을 가르치고 연구하다 보니 실증적 자료가 필요했지요. 정확한 자료를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먹을 것 입을 것 저울질해가며 한 점、두 점 사 모으기 시작했어요』
먹지않고 쓰지않는「이상한 행동」덕에 1950년까지 60여점의 의류가 그의 손에 모아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귀한 유물들은 6ㆍ25전란 속에 날라가버렸다. 또 다시 빈손. 역사와 문헌을 물증으로 확인하기 위한 그의「이상한 행동」이 다시 시작됐다.
한 점의 유물을 찾아 그가 이 땅을 헤맨 증거는 현재 박물관 현관위 한장의 지도 속에 까만 점으로 촘촘히 박혀있다. 유물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면 그는 어디라도 마다않고 달려갔고 불쏘시개로 산화해 버릴뻔한 이조중기의「어사화」는 위기의 순간에 그에게 구출되기도 했다.
그가 수집한 유물은 1600년대 이후부터 1880년대 이전까지로 국한돼있다. 조선초기의 의류나 장신구 등의 유물은 직물의 제한된 수명때문에 거의 자취를 감추어버렸고 1880년 이후부터 우리 생활사에 일본의 손길이 침투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그가 이룩한 업적이 돋보이는 것은 유물을 단순히 수집으로 끝내지 않았다는데 있다. 그는 고서를 근거로 문헌조사 ㆍ유물수집ㆍ고적답사에 이어 사진기록과 상세한 도판 및 유물복원 작업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절차를 밟아 유물을 정리 하는 것을 철칙으로 하고있다.
76년 석 박사가 단국대교수로 취임하면서 이희승 박사를 위원장으로 석주선 기념 민속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가 조직되고 5년뒤인 81년、완공을 보게된다. 그해 5월2일 개관식과 더불어 우리나라 의류전문 민속박물관 제1호가 탄생한 것이다.
『날아 갈듯이 기뻤어요. 물론 섭섭한 점도 있었지만、좁은 내집 방속에서 크게 숨도 못쉬고 움추리고 있던 조상의 유물들이 드디어 제자리를 찾았지요. 섬유는 수명이 제한된 재질이라 보관에 방충ㆍ방습은 필수조건이랍니다. 이런 조건들을 갖춘 박물관에서 우리 조상의 유물들이 더 오래 살아남아 역사연구에 도움이 된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지요』
섬유가 재질로된 자료는 거의 다 수집했다고 보는 그는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섬유자료를 일본이 보관하고 있음을 크게 아쉬워한다. 옛 것을 소중히하고 간직하던 우리의 좋은 습관이 사라져가고 젊은이들、아니 요즘 사람들 거의 모두가 물자를 소홀히 하고 쉽게 버리는 현상은 그가 몇번씩 반복할 정도로 안타까와하는 부분이기도 한다.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가 겪었던 어려움은 상상을 초월한다. 끈기와 인내가 없이는 해낼 수 없었던 유별난 작업이 하나의 체계화된 학문의 장으로 결집될 수 있었던 것을 그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성품과 작은 오빠 석주명의 영향이 컸다고 굳게 믿고 있다.
풍족한 삶속에서도 규모와 절제를 제1의 신조로 살았던 어머니는 그가 한가지 일에 매달릴수 있었던 인내의 표본이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일명「나비 박사」로 불리는 작은오빠 석주명을 그는「흉보면서 닮았다」고 말했다.
석주명의 흉은 나비밖에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니 미쳐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만큼 그는 지독한 열의로 나비연구에 매달린 사람이었다.
50년 6ㆍ25로 엉뚱하게 타계하지만 않았다면 그는 한국을 세계학계가 경탄하는 자연과학국으로 올려놓았을 인물이었다. 그는 42살의 나이에 60여만마리의 나비를 채집ㆍ측정하여 생물분류학상 새로운 학설을 제창했고 외국인들이 독점했던 한국산 나비의 계통분류를 완성한 대단한 학자였다.
『작은 오빠는 나비 얘기밖에 안했어요. 나는 그런 오빠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흉보곤 했지요』그가 흉보았던 작은오빠 석주명의 지독한 학구열ㆍ노력ㆍ끈기는 그대로 동생에게 전이된 셈이었다.
「석주선 기념 민속박물관」은 현재 7천여점의 민속유물을 자랑하고 있다.
박물관 개관 후로도 쉼없이 이어진 노력의 산물들은 석 박사가 매일 대하는 소중한 친구들이다. 사실 그에게는 친구가 별로 없다. 친구를 만들시간이 그에겐 없었기 때문이다. 유물을 찾아내고、손상된 부분을 살려내고、때와 먼지를 닦아내고 사진촬영으로 모습을 담고 다시 이름표를 달아 완성시키는 그 작업만으로도 24시간이 모자랐던 그에게 친구란 유물이 될 수 밖에 없었으리라.
『학문에 지름길이 없다는 사실은 공부를 하면서 얻은 진리랍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바로 진실과 노력 인내 세 가지예요. 과욕을 부리지않고 뛰어 넘지않고 정진할때 불가능이 없다는 것은 내가 평생을 통해 확인한 사실이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요』
거짓이 없는 학문을 연구하면서 과장없이 역사적 사실을 규명해온 그가 신앙과 만난 것은 자연스러울 수 밖에 없다.
83년 비교적 늦은 나이에 입교、압구정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그는 신앙은「믿는 것」뿐아니라「실천하는 것」임을 생활로 보여주고 있다. 버림없는 삶을 신조로 삼고있는 그는 오래전부터 물품을 모아 사람들의 관심이 닿지않는 양로원에 꼬박꼬박 보내고 있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절제하며 이웃을 생각해온 삶의 형태가 이미 신앙인의 것이었다고 표현해도 무방하리 만큼 그의 삶은 구도자적이다. 팔순에 이르기까지 남에게 살림을 맡겨본 적이 없는 그는 지금도 밥짓고 빨래하는 일을 스스로 해결한다. 단돈 5천원으로 손수 한복을 멋있게 지어 입고 종이 한조각도 함부로 버리지 않으면서 그가 이룩해놓은 학문적 업적은 구도자적 삶의 자세가 아니고는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었으리라.
매일 아침 10시、어김없이 그는 박물관 관장실에서 하루를 연다. 원고를 쓰는일과 박물관 관람을 위해 오는 손님맞이 그리고 전시회 순례는 하루일과 중 중요한 부분에 해당된다. 수십년간 이어져온 그의 원고쓰기는 유물을 구할 수 있는 자금마련에 다시 없는 방편이 되어왔다.「순전히 돈을 벌기위해」썼던 청탁원고는 현재 유물이라는 이름으로 박물관으로 되돌아와 있는 셈이다.
지금도 그는 매일 원고와 씨름하고 있다. 그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남자의 관(모자)과 여자의 수식(머리에 쓰는 것)」에 관한 책은 현재 반정도 완성된 상태에 있다.
작은 시간을 금싸라기처럼 여기고 한 조각의 종이도 아껴쓸 만큼 절제로 뭉쳐진 삶을 살아온 석주선 박사. 그러나 그는 베토벤과 모짜르트..그리고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즐겨들으며 못다한 피아노공부를 계속할 수 있기를 아직도 열망하는 멋진 삶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연보
▲1911년 9월 17일 평양 대동문 근처 이문리에서 아버지 석승서씨와 어머니 김의식 여사 사이의 3남1녀 중 외동딸로 출생
▲1938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
▲1940년 동경、일본고등양재학원졸업
▲1945년~1950년 국김과학 박물관 공예연구 실장
▲1955년~1958년 수도여자 사범대학 부교수
▲1958~1976년 동덕여자대학교수
▲1974년 8월31일 명예 이학박사(영남대학교)
1976년~현재 단국대학교 대학원교수ㆍ단국대학교 민속학 연구실장ㆍ단국대학교 석주선 기념 민속박물관장
■저서
▲1971년 한국복식사
▲1978년 석주선 기념 민속박물관 소장 목록
▲1979년 흉배(胸背)
▲1981년 의(衣)
▲1981년 속 한국복식사
■ 논문
▲1946년 조선의복 개선의 필요성을 논함
▲1947년 조선의복 제도법
▲1963년 한국의상의 역사적 고찰
▲1975년 이조 궁중의식절차에 따르는 복식제도에 관한 연구 등 다수
■상훈
▲1968년5월 10주년 근속공로상(동덕여대)
▲1972년 제1회 양서출판 문화상저술부문 금상(경향신문ㆍ한국복식사)
▲1973년 제2회 교육공로상(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
▲1980년 제20회 한국출판문화상 제작상(한국일보ㆍ흉배)
▲1981년 제14회 문화공보부 추천도서 성정ㆍ장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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