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사절을 축출하고 대사관을 점령한 공산군이 7월2일 주일에 영등포보좌 이현종 신부를 총살했다는 것은 전편에서 얘기 한바와 같다. 꽃다운 29세의 청춘신부를 이유도 없이 참살한 소식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예상은 하면서도 너무도 빨리 닥쳐온 박해에 몸둘 바를 몰랐다. 그러면서도 한편 자비하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양을 위하여 생명을 따른 이신부의 희생은 오히려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계기가 됐다.
다음해 2월9일、기독교 동맹 회원 4명이 찾아와 이 동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천주교가 존재할 수 없다며 협박을 하기에 위엄있게 거절했더니 화를 내며 돌아갔고 7월10일에는 전에 장발 교장한테 사상문제로 쫓겨난 서계원이라는 자가 공산당의 앞잡이가 되어 찾아와서는『천주교도 인민공화국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화를 면치 못할 테니 로마 교황과의 연락을 끊으라』고 위협했다. 나는 동문서답식으로 『지금 전신ㆍ전화 등 모든 통신이 두절된 상태인데 끊고 말고 할것이 있단 말이오 끊을 곳을 알려 주시오』했더니 우물쭈물했다. 다음날 11일 내무서원이란 자들이 교황사절 방주교님과 우신부、그외 3명의 수녀를 연행해 갔다. 유신부는『노인신부 수녀들만 보낼 수 없다』며 자원해서 따라갔는데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앞이 캄캄했다. 모여앉아 걱정만 하고 있는데 저녁 무렵 괴뢰군의 호휘속에 유신부가 짚차를 타고 나타났다. 신부ㆍ수녀가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왔단다. 감시가 심해 말도 나눌 틈이 없음을 직감하고 청년들을 불러 명동과 성모병원 거리쪽 일대를 지켜보고 있다가 짚차의 뒤를 밟아 보게 했더니 미도파 앞에 있는 삼화빌딩이었다. 방문을 시도했으나 허사였다.뾰족한 수가 없어 멀리서 동태만 살피도록 했다.
15일에는 혜화동에서 신부 3명과 갈멜 수녀 5명이 잡혀왔고 16일에는 춘천교구장과 신부 2명이 또 잡혀 왔단다. 18일에 빵을 구해 오라고 해서 나왔다며 유신부가 왔는데 반가움이야 어찌 글로 표현하겠는가. 그러나 그곳의 참상을 듣고 울지않는 이가 없었다. 7월19일에는 모두 어디론지 사라졌다. 죽음의 행진이 시작된 것이다. 이럴 때 신학교 교수 오기순 신부와 동성학교 정진구 신부가 별별 고생끝에 나를 찾아와 살려달란다. 의논상대도 없이 답답하고 괴로웠던 차에 이분들의 만남은 이 난관을 헤쳐나가는데 크나큰 위로가 됐다.
공산당은 교황사절과 외국인 신부 수녀들을 이북으로 압송 하자마자 압력을 가해왔다. 그 첫째로 7월20일 낮에 무장군인 트럭 4~5대가 계성학교 운동장에 진을 친 것이다. 그리고 장교 2명이 내게 와서『우리는 당신들을 괴롭히러 온 것이 아니고 해방시키러 왔으니 이 집에서 안심하고 살아도 됩니다』며 보고식으로 말했다. 쫓겨나지 않은 것만으로 천행으로 생각했다. 이런 와중에도 사제는 바빴다.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피난도 못가고 숨어 지내던 냉담자ㆍ조당자들이 양심의 가책을 가눌길 없어 회개하고 성사를 받으려고 이른 아침부터 죽음을 무릅쓰고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고백성사와 혼배성사를 받고 지금 나가다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했다. 정말 반가웠다. 고백성사는 물론 공산군이 창문으로 들여다 보는 가운데 8쌍에게 혼배를 주었다. 위험속에 순교의 꽃이 핀다더니….부족한 그들이 용감해져 기쁨에 차 돌아가는 모습에 안도의 눈물이 내 뺨을 적셨다. 2번째 압력은 바로 그날밤 10시경 장교 2명이 찾아와『장교들이 있을 방이 부족하니 이 사제관을 내일 오전중으로 비우시오』하고 명령했다. 몇시간 전만 해도 괜찮다고 하더니….다음날 사제관 짐을 교구청으로 옮기느라 진땀을 뺐다. 그리고 유치원에 주둔한 군사령관을 찾아가 교우들의 성당출입을 막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니까『걱정마오 우리는 인민을 괴롭히러 온 것이 아니니 서로 잘 협력합시다』라고 답했다. 반신반의 하는 맘으로 발길을 돌렸다.
[노사제의 회고] 수원교구 장금구 신부 17.
교황사절ㆍ신부ㆍ수녀 등 연행 돼 기독교동맹 가입ㆍ성청 관계 단절 강요
발행일1990-03-25 [제1697호,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