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일은 주일이었다.
해방후 이북의 종교탄압상을 모두 익히 들어온 바라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했다는 소식은 일반 시민들에게도 큰 충격으로 서울은 마치 죽은 도시와 같아 문밖 출입을 삼가고있는 터여서 교우들이 미사 참례를 올것인지 의심을 하면서 전과 같이 종을 치고 미사를 시작했는데 의외로 참석자는 평시의 3분의2는 됨직했다. 나는 미사중에『교형 자매 여러분、불행하게도 같은 형제끼리 총부리를 마주대고 서로 싸우고 있는 지금의 처지를 내려다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그러나 이런때 일수록 우리는 동요치 말고 신앙생활을 계속 합시다.
비록 주교님이 아니계시지만 교구청이나 본당 사무는 변함없이 진행중이니 안심하십시오. 인민공화국에도 종교의 자유는 허용될 것입니다』하고 강론을 마음에 더 할말을 잊고 말았다.
바로 이날 공산당의 포악성이 영등포본당에서 드러났다. 신부된지 석달밖에 안된 이현종(야고보) 신부가 일단 광명쪽으로 피난을 갔다가 주일이고 하여 교우들 사정도 알아볼 겸 본당으로 돌아와 미사를 지내고 성당밖으로 나오다 그자리에서 총살을 당하였으니 우리교회로서는 첫 희생자가 된 것이다. 참으로 애통한 하루였다.
불안속에 며칠을 보낸 7월6일 저녁에 나는 살아서 연도 받는 신세가 되었다. 내용인즉 이날 저녁식사 후에 내무서원 7-8명이 나를 찾아와 살기등등하게 『교회 책임자가 누구요』하고 묻길래 『나요』하니까 무조건 지하실로 가자고 했다. 한 사람은 권총으로 내 가슴을 겨누고 다른 사람은 장총을 내 등에 들이대고….
공산당이 흔히 지하실에서 죽인다는 소리를 들어 온 바라 나는『이제 마지막이구나』하고 마음 준비를 단단히 하며 끌려내려 올 뿐인데『이 구내에 지하실이 몇 개요』하고 묻는다.
『여섯개요』『그 숫자가 틀리면 총살인줄 아시요』『예 알았습니다』 이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 벌써 몇 사람은 뒤지기 시작했다.
소학교 유치원을 거쳐 성당 지하실을 뒤진 다음 성해를 모신 곳에 다달았다.
『여기는 뭘 숨겼오』『신앙을 위해 생명을 바치신 분들의 유해요』『쓸데없는 소리 마시오. 이 구내에 무기와 쌀을 감춰두었다는 정보를 듣고 왔오.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총살이오』 『다 뒤져보면 알 것 아니오』했더니 누군가에게 도끼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복자들의 성해를 납관에 모시고 곁을 시멘트로 봉하고 성명과 내력을 놓은 이곳을 도끼로 시멘트벽을 부수고 납관을 대검으로 찢었다. 뼈와 머리카락 치아 두개골 뿐. 이것을 보고 무서운지 홱 돌아 나오면서『이제는 큰 지하실로 갑시다』한다. 그러는 동안 밖에서는 청년 하나가 도끼를 들고 성당 지하실로 들어갈 때 망을 보던 내무서원 하나가 『저 신부인지 무엔지 오늘 총살당하는 날이제이』라는 빈정거림이 있은지 조금후「쾅」하는 소리가 들리자『이젠 죽었지비』하는 그 말만 들은 신자 청년이 바로 사제관으로 달려와『신부님이 총살 당했어요』하고 외치고는 회장집 교우집으로 접하는 통에 사방에서 울고 불고 하면서 연도를 바쳤다는 웃지못할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던 걸 모르고 끌려다니는데 마음이 초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은 성당 지하실 맞은 편에 문화관 지하실이 있는데 거기에는 부상당한 소령、경찰관、장면 박사 둘째 아들 안드레아 등 6-7명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들키면 살 사람이 누군가. 그곳을 피해서 다음지하실로 갈 수도 없는 형편이니 어쩌면 좋으랴! 오직 주님과 복자들께 간절히 기도하는 길 밖에…
그러는데 그들은 복자들의 유골을 보고는 급히『큰 지하실로 갑시다』한 것이였다.『옳다 됐다』생각 하고『이리로 따라 오시오』하고는 문화관쪽을 비켜서 주교댁 지하실로 직행했다. 거기에서 그들은 큰 나무통에 담아둔 포도주를 맛보고는 몇통을 싣고 돌아갔다.
이날의 숨막히는 드라마는 한편의 멋진 희비극으로 지금도 가슴이 설레인다.
[노사제의 회고] 수원교구 장금구 신부 16.
공산군 점령후 신앙박해 받아
내무서원 수색으로 복자 유해 봉변 당해
발행일1990-03-18 [제1696호,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