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명동에 부임했을때는 국가나 교회적으로 차츰 안정이 되어가던 시기였다. 민족과 교회가 오랜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났으니 새로운 움직임이 나라 안팎으로 활발하여 그 기운이 교회에도 이어져 당시 조인원 신부는 교우 문패를 달자는 제의를 참사회의에 제출했다. 그러나 미국인 도신부가 반대를 했다. 이유는 만일 공산군이 남침했을 경우 교우가 먼저 박해를 받을 위험이 크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말하면서도 급할 것 없으니 일단 보류하기로 합의했다. 그 일이 있은지 6개월후 50년 봄에 기신부가 또 『대소신학교를 필리핀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것 같다』고 제의했다. 주교님과 참사원 모두는 당치고 않다며 일축해버렸다. 그리고는 금년(50년)이 성년이고 노주교님이 승품되신지 8년이 되신 기념으로 교황청을 방문할 계획을 세운뒤 5월15일 출국을 하셨다. 『주교님、교구일은 아무 걱정마시고 편안히 다녀오십시오』하는 부교구장 이신부님의 출국인사를 받으며….그런데 출국 한달여지나 6ㆍ25는 터졌다. 미국신부들 주장이 머리를 스쳐갔다.
정부측에서는 국군이 반격、오히려 진격중이니 동요치 말고 맡은 일에 충실하라는 방송을 되풀이 했지만 후송되는 부상병들의 소식은 절망 뿐이었다. 아군은 소총과 수류탄、공산군은 대포와 탱크….이거야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격이라며 군인들은 분개했다. 6월27일 긴급참사회를 소집하여 모든 본당 주임신부는 신자들과 생사를 같이 할것、교구신부외 특별사목신부와 보좌신부들은 남쪽으로 피신 할 것、신학교는 즉시 해산、부산에서 집합 할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신학교측에서 주저타가 저녁때 미아리 근처에서 포성이 터질때에야 해산시켜 백여명의 신학생들이 갑자기 명동으로 몰려왔다. 서둘러 저녁을 해먹이고 곧바로 한강을 건너 남하토록 명하여 피신을 시켰는데 다음날 새벽 한강다리가 폭파됐다는 소식은 간담을 서늘케 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숨가쁜 하루였다.
미태평양함대 사령부에서는 비행기로 교황사절이하 모든 외국인 신부ㆍ수녀를 피신시키려 했으나 교황사절과 노인신부ㆍ수녀들은 극구 사양하므로 일부만이 일본으로 떠났다. 28일 공산군이 아직 서울에 들어오기도 전에 놀랍게도 성당건물 주위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만세」라는 전단이 나붙었다. 나중에 그것이 성가 기숙사생중 하나가 한 짓임을 알고는「사람의 원수는 그 집안에 있느니라」는 미가서 7장6절이 생각났다. 긴장속에 이틀이 지난 7월1일 교황사절 방주교가 자가용도 압수 당한채 사절관에서 쫓겨나시어 터덜터덜 걸어서 명동으로 오셨다. 올것이 오나보다 각오하니 두려움이 조금은 사라졌다. 나는『주교님 왜 그때 피하시지 않으셨습니까』하고 여쭈었더니、주교님은 태연하게『내 양들을 버리고 나혼자 어디로 도망친단 말이오』하셨다. 나는 질문한 것이 몹시 부끄러웠다.
이럴즈음 수녀원에서도 야단이났다.『수도복을 입느냐 벗느냐』라고. 방주교님 유신부님과 같이 의논 끝에 수도복을 벗는 것이 안전하겠다 하여 유신부가 찾아가 한복을 입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한복이 어디 있으랴! 교우들 집을 돌며 치마저고리를 있는대로 얻어다 보내주었다. 이 수녀들의 눈물겨운 얘기 한토막! 지금까지 머리카락한 오라기라도 남에게 보일까봐 수건으로 두겹 세겹 싸매고 살던 그들이 몸에 맞지도 않는 한복을 입고 서로 바라보며 부둥켜안고 웃다가 울다 하던 광경은 차마 볼 수 없는 한편의 희비극이었던바 빡빡 머리의 갈멜수녀들의 모습은 더욱 처참했다. 미친 여자가 아니면 영낙없는 여승의 꼴이였다. 복중에 모자를 쓸 수도 없어 별 수 없이 덥더라도 머플러를 써야만 했다. 고이 간직한 그몸에 어찌 수치와 고통의 눈물이 없었으랴 생각하면 그들의 고통과 희생이 자유를 얻는 승리의 밀거름이 되었으리라. 지면상 축소하다보니 실감있게 그리지못해 당시 고통을 당한 생존해 계신분들께 송구할뿐이다.
[노사제의 회고] 수원교구 장금구 신부 15.
6ㆍ25로 신학생 남쪽으로 피신
수녀들 수도복 대신 한복 입어
발행일1990-03-11 [제1695호,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