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포부인 농촌사목의 꿈을 안고 신학교를 떠나 이천으로 부임하여 큰 뜻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5개월만에 명동으로의 발령은 내겐 큰 충격이었다. 초라한 농촌에서 대도시 명동으로…. 모두를 영전이라고 쾌재를 부를 일이었던건만 내게는 관직을 떠나 유배지로 가는 심정、 바로 그것이었다. 영적인 면에서 병이 들어도 치료할 의사와 약이 없어 죽어가고 헐벗고 굶주려 영양실조로 허덕이는 시골의 양떼들이 나는 더 소중하고 애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느님의 뜻이라 여기고 주교님의 사목방침에 순응하면서 이천을 떠나 48년 8월 7일에 명동성당으로 부일했지만 이천본당과 공소를 헤매는 나의 마음에서 섭섭함과 안타까움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곧 대축일이 다가오는데….
내 심정도 아랑곳없이 성모승천 대축일이 돌아왔다. 그날 노주교님 대미사후에 놀랄 일이 벌어졌다. 5~6백여명의 신자들이 모두 신을 벗고 미사에 참여했는데 미사후 성당 밖은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내 신이 바뀌었다. 내신이 없어졌다』하며 아우성이었다. 맨발로 가라고 할 수도 없이 생각 끝에 부랴부랴 운동화를 수십켤레 사다가 망신을 면했는데 그일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됐다. 당시 제대 가까운 곳에 장궤틀이 십여개 있었는데 거기에는 프랑스 사람 명패가 불어있어 자리가 비여 있어도 한국교우는 앉지를 못했다. 그래서 축일을 지내고 곧 바로 목수를 불러 장궤를 70여개를 만들어 성당안에 나열하고는 신장을 없애 버리니 성당출입이 그렇게 편리할 수가 없었다. 청소는 더 열심히 해야겠지만…. 이로인해 명동성당이 한국 최초로 장궤틀을 설치한 명당이 되었다.
다음으로 급한 일은 양들의 신앙상태 점검이었다. 비록 신자수는 4천명이 안됐지만 상당히 넓은 지역에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가가호호 방문에는 많은 시일이 필요하므로 동별로 모집하여 만나는데도 1개월 반이 소요됐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세운 계획이 바로 본당 분할이었다. 명동본당이 조선조 말에 창설될 때 시내(성안)는 물론 성밖으로는 동대문 밖과 광주군 일대、 동소문밖과 고양군일대 등 광범위한 지역을 근 50년 가까운 세월동안 관장해오다가 1927년경 소신학교가 혜화동으로 이전되는 기회에 혜화동본당을 신설했을 뿐이다. 60여년 오랜 세월동안 넓은 지역을 사목하면서도 교우가 4천명을 넘지 못했으니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곰곰히 생각하여 내린 내 소견은 첫째、 박해때부터 사목해왔던 사제가 언어와 풍습이 다른 외국인으로(주로 프랑스인) 박신부가 46년、 우신부가 16년 가까이 사목해왔다는 점과 둘째는 교통이 불편、 목자와 먼 거리의 신자들이 자주 회동치 못한점、 셋째는 평신도의 활동이 부진했다고 생각됐었다.
그리하여 2년전부터 계획이 수립된 세종로본당을 이번 기회에 완전히 분리하고 3개월뒤에 신당동본당(48년)을 신설、 성탄미사를 지내도록 하고 1년후 가회동본당을 신설하고 때마침 이북에서 남하한 신부들을 취임토록 했다. 그리고 6·25의 난리가 끝나고 종로성당을. 이제는 본당간의 단합을 위해 교리경시대회 체육대회 등을 개최하여 사목 활성화에 주력하는 한편 최초로 시내 사제총회를 열어 전교방침 친목 등을 도모했으나 교구행정을 비판한다는 오해로 몇해 후에 중단되고 말았다. 이제 명동은 공소가 없는 본당이 되었으므로 몇개 동을 30구역으로 나누고 춘추판공을 실시하며 신자들을 보살폈으니 이것이 오늘날 구역·반 모임의 시조였다. 재임중、 제5본당 신설계획으로 묵정동에 대지를 물색하고 계약단계에서 강화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후임자에게 인계하고 떠났는데 지금까지도 그곳에 성당이 설립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또한 난리통에「복자성해」훼손、 성당을 공산당에게 빼앗겼던 일은 가슴 아픈 일로 나의 젊은 10년을 명동은 삼켜버렸다.
[노사제의 회고] 14.수원교구 장금구 신부
명동에 국내최초 장궤틀 설치
4개 본당 분할후 활성화"주력"
발행일1990-03-04 [제1694호,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