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에 총독부에서는 용산과 대구 유스띠노신학교가「무인가 학교」라는 구실로 폐쇄명령을 내렸다. 큰 근심에 싸여 잠도 제대로 오지않았다. 그러나 한가닥 희망은 아직 폐쇄령이 떨어지지 않은 덕원신학교였다. 덕원신학교와 거듭 교섭을 펼친 결과 현재 용산·대구유스띠노 신학교의 최고 학년은 편이할수 있으나 다음 학년은 못 받는다는 조건으로 전원 편입을 하게 됐다. 우선 급한 불은 끈셈이었지만 43년도 졸업생은 어찌해야할지 걱정이 됐다.
교수회의 끝에 사감인 신 신부님이 서정덕 선생을 앞세워 신학교 인가신청을 제출했다. 그러나 한국주교 취임 반대 공작 실패로 보복적인 신학교 탄압을 가한 총독부에서 그렇게 쉽사리 허락할리 계속 시도한 끝에 3년이 지난 어느날 좋은 기회가 드디어 왔다. 다름아닌 가톨릭에 호감을 갖고 있는 엄창섭씨가 학무국장으로 취임한 것이다. 엄창섭씨는 모(某)신자 할머니의 양아들로 이할머니의 공이 컸다. 할머니는 엄창섭씨에게 『네가 그 자리에 있는 동안 천주교 신학교가 정식으로 인가를 받을수 있도록 힘 좀 써다오. 내 생애에 네게 바랄 것은 이것 밖에 없구나』하면서 만날 때마다 간청, 1945년 3월에 드디어 정식으로 인가를 받게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모두 얼싸안고 기뻐했는데 그중에서도 3년동안 심혈을 기울인 신신부과 할머니의 기뻐하는 모습은 참으로 눈물겨웠다. 또한 신학생들 역시 이에 못지 않게 매우 기뻐했다. 그간 무인가 학교로 서러움을 받았던 대신학생들, 학생도 아니요 사회인도 아닌 처지에서 이제는 전문학생으로 4각모를 쓰고 어깨를 펼수 있어 좋았고 식량배급표를 받을 자격이 생겼으나 흡족했다. 이제 남은 일은 교장승인 수속 뿐이다.
학식과 경력 연령 모든 면에서 탁월한 사감신부겸 교장직을 맡아오신 신 신부님이 적임자임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사실로써 아무도 의심할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인고! 나이도 어리고 덕망·학식·경력등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나를 교구 참사회에서는 교장으로 임명하고 신 신부님은 본당 사목으로 발령을 내렸다. 나는 놀랍고 당황하여 즉시 주교님께 달려가 애걸했으나 허사였다. 주교님은 『교구 참사회에서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것인데 무슨 장난인줄 아는가. 자네뒤엔 내가 있으니 걱정말라』며 용기를 주신다. 이리하여 어쩔수 없이 교장취임식과 개교식을 끝내고 정상업무 수행에 몰두했다.
1학기를 마치고 방학에 들어갔다. 나는 성모승천 대축일을 구산공소에서 지내고 돌아왔는데 조국 해방의 물결이 삼천리 강산을 뒤덮던 그날이었다. 해방의 기쁨과 소용돌이 속에 학교들의 움직임은 활발하여 기존 전문학교는 대학으로 승격되고 새로운 대학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났다. 이와함께 우리 신학교도 장래를 생각해 대학으로 승격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교수회의 의견에 따라 주교님과 유지들의 협조로 승격수속을 시작했다. 그동안 주변 신학교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덕원 신학교가 폐쇄되어 학생들이 혜화동 신학교로 몰리게 됐다. 예전부터 대·소신학교가 한 구내에 있어 애로가 많았는데 이제는 더 큰 일이 아닐 수 없어 대학과 성신중고등학교 신설인가 신청을 함께 제출했다. 운이 따라 1947년 4월초 대·소신학교가 동시에 인가가 떨어져 혜화동에서는 「성신대학」개교식을, 용산 성심학교 자리에서는 「성신중·고등학교」개교식을 거행, 대·소신학교가 완전 분리되어 진정한 사제양성 교육의 장이 마련됐다. 실로 험난한 고초였다고 생각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유능한 교수의 부족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1937년 장래를 생각하고 인재양성을 해달라고 청원했던 그 사건이 시기적으로 조금은 늦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주님의 안배로 그나마도 그렇게 늦지 않게 선발대로 유학갔던 윤을수 신부가 48년에 귀국하고 연이어 해마다 우수한 인재들이 속속 귀국, 나는 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내 취미인 개척사목(농촌)의 길을 걷고자 주교님께 사표를 제출했는데 48년 3월에 신설중인 이천본당으로 발령이 내려 신학교를 떠났다.
[노사제의 회고] 수원교구 장금구 신부⑫
신학교 정식인가…校長에 취임
47년부터 大·小신학교로 분리
발행일1990-02-18 [제1692호,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