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호원에서 복잡한 문제를 깨끗히 해결하고 이제는 평온한 가운데 사목을 시작하겠다고 결심하고 주교님께 보고차 갔더니 『내년 3월에 신학교수로 임명하니 준비하고 있으시오』하는 명령이 내렸다. 정신이 아찔했다. 순간 일전에 윤형중 신부와 임충신 신부가 즉흥적인 문답 형식의 대화로 한바탕 웃었던 일이 생각났다.
언젠가 윤신부가 임신부에게 『자네 이제 신학교 선생으로 갈 것 같네』하니까 임신부는 즉석에서 서슴치않고 『내 문답 한번 들어보려나』하면서 「문」:『차라리 죽을지언정 신학교 선생으로는 못 갈 것이라하니 이 말이 너무 과하지 아니하뇨?』「답」:『과하지 아니하니 신학교 선생으로 드러가기를 죽기보다 더 싫어해야 할지니라』하며 『이만 하면 내 심정을 알겠나』했다. 이것은 예전 천주 공교요리문답 고해편에 『차라리 죽을지언정 다시 범죄치 못하리라 하니 너무 과하지 아니하뇨? 너무 과하지 아니하니 범죄하기를 죽기보다 더 무서워 해야 하느니라』하는 조목에서 「범죄」를 「신학교」로 바꿔 인용한 것이다. 그때는 배꼽을 잡고 웃고 넘겼지만 막상 이제 내가 당하고 보니 웃을 일만이 아니었다.
신학교 하면 당연히 교회학문을 배우는 곳 즉 진리를 배우고 연마하는 곳으로만 착각하기 쉽지만 학문보다도 그리스도의 모범적 생활을 배우는 학교라함이 마땅하다. 따라서 신학교를 다른 표현으로 「못자리」라는 독특한 말로 표현하게 됐다.
농사꾼의 중요 관심사는 못자리로 농사의 승패가 여기에 달렸듯이 교회의 중대사도 신학교에 있다. 그래서 공의회문헌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에 이렇게 쓰여있다.『신학생들의 교육은 현명한 법규와 특히 자격 있는 교육자들에게 달려 있으므로 신학교 교수들은 가장 훌륭한 인재들 가운데서 발탁하여야 하며 또한 건실한 학식、 적당한 사목경험、 영적 및 교육학적 특수 훈련으로 세심하게 인재를 양성해야한다. 장상들과 교수들은 학생들이 받는 교육의 결과가 자신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에 얼마나 크게 좌우되는가를 명심해야 한다. 그들은 학장의 지도 밑에 정신과 행동면에 긴밀한 일치를 유지하며 자신들끼리 또 학생들과 더불어 「그들이 한가 되게 하소서」하신 주의 기도를 실천에 옮길 수 있고 학생들안에 그 성소의 기쁨을 북돋아 줄 수 있는 그런 과정을 형성해야 한다 』고 했다. 이런 교령을 알고서야 누가 감히 신학교 교수직을 수락할 수 있겠는가. 앞서말한 임신부의 문답이 나올만도 했다. 나도 신품 받기전에 이것을 짐작하고 주교님께 인재양성을 간청하는 진정을 올린 일이있다. 그 결과로 윤을수 신부를 선두로 한공렬ㆍ선종완 신부 등 7~8명의 신학생들이 유학을 가게 되었던 일이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그러나 현재 훌륭한 선배 신부님들이 교장과 교수로 봉직하고 계시니 나는 따라만 가면 되겠다는 생각에서 수락을 결심했다.
당시 신학교 교장으로는 신인식 신부、 교수로는 최민순ㆍ이재현 신부、 결리는 박고안 신부가 재임 중이었고 대신학생 20여명 소신학생 50여명이 생활하고 있었다.
이렇게 80여명 식구가 한 곳에 모여 살았는데 당시 식량 조달은 소신학생이 동성학교에서 받아오는 양곡 배급표로 쌀을 사다가 80여명이 먹어야 했기 때문에 먹기보다 굶고 산다는 표현이 더 걸맞는 말일게다.
내가 오기 전에는 이런 사건도 있었다고 했다. 소신학생들이 배급표를 타가지고 오던 중 몇 명의 학생들이 『기왕 굶을 바에야 배급표를 갖다주어서 무엇하는냐』며 배급표를 찢어버리는 바람에 7~8명이 무더기로 퇴학을 당한 사건이 생겼다. 그것이 과연 퇴학조건이 될지는 의문이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교수로 부임하여 공부시간에 교실에 들어가 보면 다들 끼니를 굶어 늘어져서 엎드려 있으니 공부인들 오죽하랴. 밖에 나가놀라고 해도『기운이 있어야 놀지요』하는데는 할 말이없다. 이런 곤란은 39년 내가 혜화동 보좌시절 전부터이니 5년째 계속된 셈인데 그래도 참고 견디는 학생들이 갸륵하기만 했다. 이런 환경에서 사제가 되어 늙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신부가 벌써 10여명이 넘는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고통으로 인해 좌절、 사제의 길을 떠난 이들에게 송구할 뿐이다.
[노사제의 회고] 11. 수원교구 장금구 신부
“식량부족으로 굶는 일 예사”
44년 신학교 교수로 부임
발행일1990-02-11 [제1691호,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