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보좌를 거쳐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유학중인 3명의 신부와 10여명의 신학생을 돌보다 각기병으로 귀국한 때가 1943년 7월, 장호원 주임으로 발령이 났다. 일제말기 수난중에 있다는 장호원본당에 나를 택하시다니…어깨가 무거워졌다.
당시 장호원 주임인 프랑스인 부이용 임 신부님은 프랑스 첩보요원이라 의심하여 연금시켜놓고 교우들에게 사제관, 성당 출입을 막고 감시했으며 괴산군에 있는 세공소 회장들을 임 신부와의 음모죄로 모진 형벌을 가한 후 대전 형무소로 보낸 사건도 있었다. 동창 조인환 보좌신부는 괴산서로 연행돼 혹형속에 40일동안 규류중 유력인사의 도움으로 석방된 바로 그 시점이니 신앙이 부족한 교우들은 냉담하고 예비자는 고개를 가로 젓던 난관의 때였다. 그래도 빨리 나의 양들을 보살필 신념으로 기도하고 7월 7일에 서울에서 동행한 조순호 청년과 김레오다의 안내로 성당으로 가는 도중에 회장 두분이 인사를 했다. 성당에 들어서면서 어떤 부인과 마주쳤으나 인사도 없이 줄행랑을 쳤다. 즐겨 맞을 신부를…가슴이 메어졌다. 곧 바로 임신부님께 민사를 드린 초연한 태도로『왔오? 집무실로 가보시오』할 뿐이다. 잠겨있던 문을 열고 들어서니 먼지와 곤충의 시체만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3명이 한동안 쓸고 닦아 겨우 잠자리를 잡고 우선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모기와 씨름 중에 그날 밤을 지새웠다. 이른 새벽 밖을 보니 울창한 숲속에 새끼 노루가 뛰놀고 있었다. 마치 심산유곡의 별장과도 같았다. 미사 참여자는 4~5명 정도에 불과했다.
조반을 들고 사색에 잠긴 나를 위로차 조순호가 찾아와 1km쯤 떨어진 신대말 점촌으로 산책을 가자고 했다. 동네 입구에 이르니 50여명의 남녀교구들이 모여 있어 흐뭇했으나 가까이 가니 남자만 10여명 뿐이었다. 가만히 둘러보니 아녀자들은 담 뒤에 숨어있는것이 아닌가. 이것도 양반 풍습인가! 언뜻나는 신학생때 장호원 출신 서상필이가 여러가지 조사차 방학때 황해도를 다녀와서『충북은 모든 면에 30년은 뒤졌다』도 한 말이 기억났다. 햇수는 몰라도 분명 그렇게 느껴졌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조금 넘기고 보니 우선 급한 것이 교회와 경찰간의 문제였다. 그래서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을 기회로 회장피정을 계획, 각 공소로 공문을 하달하니 도경찰부에서 금지령을 발표하여 나는 다시 연수회를 고집했다. 도경에서는 경찰간부가 참석하는 좌담회 형식으로 허락을 했다.
그날이 오자 한국말을 아는 도경국장이 회장들보다 먼저 와서는 좌담회에서 자기가 질문을 할테니 회장들이 대답 못하는 것은 신부가 대답하란다. 지면관계상 어두절미(魚頭絶尾)하고. 도경국장은『성경에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라했는데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 높으냐 천황이 높으냐?』고 질문했다. 회장들은 눈만 멀뚱, 눈치만 보며 침묵이다. 답답했던지 국장은『염병·흉년·전쟁이 일어나면 말세가 온 줄로 알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지금이 말세냐』등등 여러가지 질문을 했다. 좌담회가 아니라 문초였다. 그중에 몇가지는 답하였는데 내게는 질문을 하지않는다. 분위기가 이래서는 곤란하다 싶어 헛기침을 한번하고는 휴회를 제의하여 국장을 내방으로 불러 앉혀놓고 술상을 대령했다.
그 자리에서 모든 문제를 대답해주었더니 고개를 끄덕거린다. 도경국장은 술상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주재소(파출소)에 들러『이제부터는 성당에 대한 감시를 풀고 자유롭게 출입토록 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교회활동은 발에 방동기가 달린듯 매우 활발했다.
다음 숙제는 교무금. 임신부님은 생활비·교회운영비를 사비로 충당해 왔으니 교무금은 유야 무야다.
교무금을 배당제로 한 결과 42년에 1백 70원에 불과했다. 이래서는 곤란하여 일장훈시후 임의대로 맡겼더니 43년은 1천 5백원으로 껑충뛰었다. 황소 한마리가 50원이었으니 생각해보면 무척 큰 액수이다. 이리하여 모든 것이 안정되자 부임 8개월만에 신학교 교수로 발령이 나서 한많은 장호원본당을 떠났다.
[노사제의 회고] 10. 수원교구 장금구 신부
日警감시로 사목에 고초겪어
교무금 자유책정후 평소보다 8배증가
회장단 연수후 신앙자유 얻어
발행일1990-02-04 [제1690호, 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