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되고 착하고 아름답게 살자」. 혜암 (惠庵) 류홍렬(79세ㆍ라우렌시오) 박사가 평생을 벗삼고 살아온 삶의 지표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일생을 한국사 연구에 몸바친 老학자는 「참되고 착하고 아름답게」즉 진선미를 추구하는 삶의 자세를 통해 학문적 탐구를 보다 풍요하게 살찌워온 한국「사학계의 거목」이다.
35년 경성제국대학 조수로 학계에 발디딘 이래 서울대ㆍ성균관대를 거치면서 오직 한국사연구에 몰입, 외길 인생을 걸어온 류 박사의 학문을향한 열정적이고도 지지한 자세는 8순을 눈앞에 둔 고령의 나이를 무색케하고있다. 현재 인하대 초빙교수로 자신에게 있어 가르치는 일이 종신 (終身) 직임을 강조한다.
「타고난 학자」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아닐 수 없다.
「조선독립사상사」「한국문화사」「최근한국사」「한국 현대사제1권」「한국문화사대계 종교철학사 (공저)」 등등. 류 박사가 집필한 주요 서적들의 목록만으로도 사학계를 풍미한 그의 자리를 어렵지않게 가늠할 수 있다.
학문적인 업적과 쌍벽을 이룬다고 감이 진단할 수 있는 또 다른 업적은 그의 인생 절반을 훨씬 넘는 신앙에의 길목에서 이루어진다. 36년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가톨릭에 입교한 그는 교회 제반조직이 미약했던 60년대「한국 가톨릭 평신도사도직 중앙협의회」를 결성, 초대 회장을 맡아 평신도운동의 기초를 마련한 장본인이다.
어디 그뿐인가. 1백3위 한국 순교 복자를 성인반열에 올리는 시성운동은 그의 주장으로 첫 걸음을 내디뎠다고 할 수 있다.
5공청산을 둘러싸고 어수선하기만한 정국, 전반적으로 제자리를 찾지 못해 혼란스럽기도한 오늘의 사회가 원로 사학자의 눈에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을까.
『인간이 찾고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진ㆍ선ㆍ미로 귀결된다고 봐요. 이것을 추구하다보면 과학ㆍ예술ㆍ도덕ㆍ문화 등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 정당한 것에 대한 반대가 나오고 이들이 합쳐서 발전하는 과정이 혼란스럽게 보일 수 있다는 류 박사의 진단은 『우리 사회가 다소 혼란스럽게 보이지만 반대개념이 있어야 발전하는 것이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역사는 혼란 속에서 진전되는 것」임을 역사연구를 통해 터득한 때문일까. 세상을 먼저 살았고 그 경험ㆍ경륜에 비추어 보수적 시각일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간 셈이됐다.
류 박사와 학문, 그것도 역사와의 만남은 그의 가계와 결코 무관하지가 않다.
1911년 경기도 장연(현재 휴전지대) 에서 이름난 유교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류 박사의 생애는 선조대대로 역사에 깊숙히 관여해온 배경을 안고 시작된 셈이기 때문이다.
경성제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류 박사는 경성제국대학에서 사학과 (한국사전공) 를 선택, 역사와 인연을 맺게된다. 우리민족이 일본에 나라를 잃게 된 까닭을 밝혀보기위한, 다분히 민족적인 의식이 사학을 선택하게 된 동기였다고 류 박사는 술회했다. 그의 졸업논문은 「조선에 있어서의 서원(書院)의 성립」.
대학졸업과 동시에 대학연구실 조수로 채용된 그는 의욕적인 연구 작업을 시작, 유수학술지에 논문을 거듭 발표함으로써 한국 사학계에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학문의 길은 해방, 6ㆍ25, 5ㆍ16을 거치는 혼란기를 헤쳐나오면서 발전하고 성숙, 류 박사는 사학계의 원로로 그 자리를 확고히 하게된다.
『45년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고 우리겨레가 36년만에 일본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나라 사람치고 기쁘지않은 사람은 없었을 거야. 그러나 일본통치하에 눈치보며 우리겨레의 역사를 연구하던 내 기쁨은 말로는 다 표현이 부족할 정도였다』
새로운 대학들이 설립되고 당시 동성상업학교로 자리를 옮겨앉았던 류 박사는 국립 서울대학교 국사학교수로 취임, 우리의 의식과 우리의 눈으로 보는 사학연구에 전념하게된다. 강의를 통해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정신과 역사의견을 깨우치는 등 후배들을 길러내면서 류박사는 사학관련 서적의 필요성을 절감, 저술에도 진력하게 된다.
3년간의 미군정이 끝나갈 무렵 탄생한 첫 저서가 「조선독립사상사고(考)」. 같은 해 「중등 서양사」가 출판된 것을 비롯,「중등국사」「한국문화사」등 교과서를 잇달아 집필, 류 박사는 정확한 역사의식 확산에 정열을 쏟는다.
『50년 6ㆍ25 발발 후 남북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고 당시를 회고하면서 상기된 모습의 그는『40세의 젊지않은(?) 나이였지만 무엇인가 도움이 되고싶어 공군 장교후보생을 지원했다』고 웃었다. 제2대 공군정훈감이란 중책을 맡아 새로운 경험을 하기도한 그는 휴전과 더불어 중령으로 예편, 천직인 대학으로 돌아오게 된다.
환도 후 그는 의예과부장으로 대학행정에도 관여하면서 「문교부 중고등학교 검정인교과서 심사위원」「외무부 외교사연구회위원」 「문교부 국사편찬위원회위원」등을 맡아 교육분야 재건에 발벗고 나선다. 왕성한 학구열, 그에 따른 학문적 위치가 국내는 물론 국제학계에 알려지고 그는 56년 미국 하버드대학 유학이라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서독 뮌헨에서 열린 제24차 「국제 동양학자 회의」참가를 계기로 류 박사는 국제 동양학회, 국제 역사학회 등에 진출, 국제무대에서「한국학 붐」을 일으키고 한국문화를 알리는 선구자 역할을 기꺼이 맡게된다.
『당시만해도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는 보잘것 없는 존재였지. 학술적인 교류의 기회도 거의 없었던 때라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할때마다 우리의 역사문화를 알리려고 최선을 다했어요』 60년 학술원회원이 되면서 학문을 향한 그의 자세는 새롭게 인정되고 62년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63년 3ㆍ1문화성, 66년 학술원상, 72년 국민훈장 목련장등 굵직한 상을 수상, 구체적인 결실로 드러나기도 했다.
4ㆍ19, 5ㆍ16등 격변 속에서 그는 서울대 교무처장ㆍ총장직무대리라는 중책을 맡아 혼란기의 학사업무를 담당, 행정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가르치는 일과 저술은 학자에게 있어「필수과목」이라 할 수 있지만 남다른 저술 의욕을 가졌던 그는 50세의 나이를 넘기면서 저술에 몰두, 20여편의 국사관련 책들을 지어내거나 감수했다.『촌시를 아껴 책을 만들었지. 그 중에서도「한국천주교회사」는 가장 애착이 가는 책으로 지금도 집필당시를 잊을 수가 없어요』
「한국천주교회사」. 그가 소중히 아끼는 한국천주교회사를 얘기하자면 그의 신앙입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전통을 자랑하는 유교집안 출신의 류 박사가 천주교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유교가 바탕을 이루는 학문연구가 일조를 했다.
대학졸업 논문을 학문적으로 발전시키기위해 연구하던 그는 주자학에서 유래한 서원이 민족사상사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당쟁을 부채질했다는 사실에 학문적 회의를 느꼈던 것. 새로이 연구과제를 찾던 그에게 「실학운동과 서학」이 눈에 띠었다.
이 무렵 류 박사는 결혼이라는 중대사를 눈앞에 두고있었고 신부감은 대구의「서부자집」으로 유명한 서상돈씨의 손녀딸이었다. 박해를 피해 대구로 피난간 서씨집안의 천주교신앙은 자타가 공인하던 터였고 이 같은 배경은 그의 개종에 또다른 영향을 미쳤다고 볼수있다.
어쨌든 서학이라는 학문연구를 위해 명동성당을 찾았던 류 박사는 결국 당시 명동보좌였던 노기남 신부에게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게된다. 1936년 9월이었다. 기왕에 발디딘 신앙세계에 류 박사가 안주할리는 만무했다.
『38년 무조건 경성교구장 원 주교를 찾아갔지. 한국천주교회사를 공부하고 밝히는 일에 힘쓰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이에 감동한 원 주교는 서가에서 두터운 책 두 권을 그에게 내어주었다. 바로 불어로된 달레 저 「조선천주교회사」였다.
밤마다 불어사전을 들추어가며 조선천주교회사를 읽기시작했고, 경향신문 주간이던 윤형중 신부의 독촉 속에 류 박사는 49년 조선천주교회사 상권을 마무리했다. 곧이어 준비에 들어간 하권은 6ㆍ25 발발로 미뤄져 무려 12년만인 62년 빛을 보게 된다.
한국의 길에서 비교적 일찍 신앙과 만난 류 박사가 평신도사도직 활동에 참여한 것은 자연스러울수 밖에 없다. 57년 이해남 교수 (당시 한양대총장) 와 함께 로마에서 열린「제2차 세계가톨릭평신도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것을 계기로 평신도로서 류 박사의 활동은 전개된다.
67년 제3차 세계가톨릭평신도대회에 류 박사는 19명의 한국대표를 이끌고 단장으로 참석한다. 「인간여로에 있어서의 하느님의 백성」 을 주제로 한 3차대회의 결론은 각나라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당시 대전교구장으로 한국대표단을 인솔했던 황민성 주교의 지도로 68년 한국 가톨릭평신도 중앙협의회가 탄생했고 깊숙히 관여했던 류 박사는 초대회장에 피선된다.
『그 해 11월부터 평신도의 날이 설정되고 이날 미사 중 강론은 평신도가 맡는 전통이 수립됐어요. 일천한 교회역사로 볼 때 우리의 평신도조직은 유규한 역사를 지닌 세계교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셈이지』
세계 평신도대회 결론을 곧바로 실천에 옮긴 류 박사의 활동은 68년 10월 병인박해 순교자 24위가 복자품에 오름으로써 1백3위 시성운동으로 승화되기 시작한다. 『4년간 맡았던 평협회장직을 통해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1백3위 시성을 주장했어. 아마 당시로서는 1백3위시성 주장이 좀 생경했던 것 같아요』
그의 주장과 평협의 계속적인 노력에 힘입어 75년 1백3위 시성운동은 평협의 사업으로 통과되고 77년에는「시복시성추지위원회」가 결정된데 이어 78년 1백3위 시성청원을 교황청에 공식접수시키게된다. 84년 2백주년당시 1백3위 시성식의 감회가 류 박사에게 있어서 남다를 수 밖에 없을것이다.
라자로돕기회 회장으로 오랫동안 구라사업에도 참여한 류 박사는 현재 「천진암성역화 부위원장」 「돈암동성당 노인대학장」을 맡아 변함없는 일상을 살고 있다.
부인 서정서 여사와의 사이에 둔 3남3녀를 훌륭히 키워내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있는 그는 무골호인으로 알려져있다. 학문에 관한한 철저하고 엄격하지만 낙천적이고 온유한 친성, 그리고 솔직함때문에 그는 부드러운 사람으로 기억되고있다.
대구대학장ㆍ성균관대학원장을 거친 현재 류 박사의 공식 직함은 인하대 초빙교수.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 평생 학문을 놓지않고 살아온 그는 외길 학문인생을 신앙의차원에서 승화시킨 신앙인으로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기를 바라고 있다.
年譜
▲1911년 4월 경기도 장연군 군내면 정자리 477번지에서 부친 류인희 선생과 모친 박윤병 여사의 2남으로 출생
▲25년4월 경성 제일공립 고등보통학교입학
▲32년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 입학
▲35년3월 동 대학 조수취임ㆍ진단학회 입회
▲36년9월 천주교로 개종
▲36년11월 고 서병주씨 여식 서정서와 결혼
▲38년4월 동성상업학교 교사 취임
▲45년10월 서울대 사범대학 부교수 취임
▲47년7월 서울대 문리대 부교수 취임
▲48년7월 서울대 교수로 승급
▲50년10월 서울대 문리대 문학부장 겸직
▲52년5월 서울대 의예과부장 겸직
▲54년4월 문교부 중고등학교 검인정 교과서 심사위원 피촉
▲56년10월 미국무성 초치교수로 하버드대학 유학
▲57년8월 서독 「뮨헨」에서 열린 제24차 국제동양학자회의 참석
▲57년10월 로마에서 열린 제2차 세계천주교 평신도회의 참석
▲57년11월 서울대 교양과정부장 겸직
▲58년1월 한국사학회 이사 피촉
▲60년3월 학술원회원 피선 (현재까지)
▲60년7월 서울대 교무처장 겸직
▲61년9월 서울대 총장직무대리 겸직
▲63년2월 서울대에서문학박사학위 취득
▲66년1월 문교부 교수자격심사위원회 피촉
▲66년9월 대구대학장취임 (67년까지)
▲67년10월 제3차 세계천주교평신도회의 참석
▲68년7월 성균관대학교 교수취임
▲68년11월 한국 가톨릭 평신도사도직중앙협의회회장 피선
▲69년12월 가톨릭 군종후원회 부회장
▲70년3월 성균관대 대학원장 겸직
▲70년5월 한국사 편찬위원회 위원
▲70년5월 성균관대학교 총장직무대리 겸직
▲70년8월 한국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피선
■상훈
▲62년 문화훈장 대한민국장수상
▲63년 3ㆍ1문화상 학술상수상
▲66년 대한민국 학술원상수상
▲72년 국민훈장 모란장수상
■저술
▲48년 조선독립사상사고(考)
▲49년 조선천주교회사 상권
▲50년 한국 문화사
▲62년 최근 한국사
▲62년 한국천주교회사 하권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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