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야기는 한 대목에서 다른 대목으로 넘어가는 어투가 연결이 잘 안되어 이해하기가 좀 어려운 점이 있다. 그것은 한말에서 다른 말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빠져 있어서 이렇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복음서 내용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이 있은 후 예수의 일행은 산에서 내려온다. 예수께서는 내려오면서 제자들이 오늘 본 일에 관하여 비밀을 지키라고 분부하신다.
그러나 그 비밀엄수 명령은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로 한시적이다.
그들은 명령대로 침묵을 지켰지만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의 뜻을 몰라 어리둥절해 한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엘리야가 먼저 온다고하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고 예수께 엉뚱한 질문을 한다.
예수의 대답은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엘리야는 이미 왔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고 멋대로 다루었다고 하시고 느닷없이 사람의 아들에 대한 운명을 말씀하셨다. 성서에 따르면 사람의 아들도 많은 고난을 당하고 멸시를 당할 것이라고 덧붙이셨다. 그때서야 제자들은 세례자요한을 두고 한 말씀인줄을 깨달았다. 대충 이러한 내용으로 오늘 이야기는 꾸며져 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것과 비밀을 지키라는 명령은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이 나타난 것을 말하는 어투이다.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을 뵙고 산에서 내려온 후부터 모세는 하느님을 봬온 사람으로 백성들 간에 통하게 되었고(탈출 32,15:34,29) 다니엘이 티그리강가에서 모시옷에 순금띠를 두른 사람을 보았을 때(다니 10,5) 그는 마지막 때에 영원히 살아남을 사람들의 명단을 보여주며 그때까지 이 말씀을 비밀로 하라고하였다(12,4-9).
예수의 일행이 산에서 내려 왔다는 말은 제자들이 산에서 신적인 관경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마감하는 구약성서적인 형식이다.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이 말씀은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부활 때까지 감추려는 소위 메시아의 비밀이라고 불린다.
발설금지의 분부는 복음서에서 9번 하셨는데 그때마다 메시아의 출현을 오해하는 유대아 학자들과의 물의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9번은 마귀를 쫓아내면서 세 번(마르 1,25:1,34:3,12) 병자치유와 죽은 이의 소생기적 때 4번(마르 1,44: 루카 5,14: 마르 5,43: 루카 8,56: 마르 7,36:8,26) 사도들에게 두 번(마르 8,30: 마태 16,20: 루카 9,21: 마르 9,9-13: 루카 9,36)
사실 유대아의 민중과 골수 민족주의자들의 메시아관은 세속적이고 정치적이어서 하느님의 구세사계획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예수=메시아’의 메시아관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차이가 있었다. 이 참된 메시아관을 이해시키는 데는 고난과 부활이라는 교육과정이 필요하였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였다는 것은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비밀을 묵시문학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다니엘도 계시를 받고 그가 본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고(7,28) 에스드라의 묵시록에는 하느님이 모세에게 보여준 일들을 마음속에 간직하라고 분부하셨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제네바성서의 에스드라 2서: 불가따의 4서14,8). 성모 마리아도 아기 예수의 성탄을 전하는 천사들의 말과 목동들의 말을 마음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루카 2,19).
엘리야의 재림에 관한 제자들의 연결성 없는 질문은 엘리야에 관한 말라키아서의 기사(3,2-3:4,5-6)와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연결고리로 하는 사도교회의 가르침을 생각해야 풀릴 수 있다. 엘리야는 야훼의 날 마지막 날에 죽은 이들이 부활하기 전에 나타난다고 기대하고 있었다.
산에서 엘리야가 나타난 것을 본 제자들은 엘리야가 다시 살아난 것을 보고 어리둥절하여 엘리야가 언제 다시 올 것이냐고 물었는지도 모른다. 엘리야가 와서 아비의 마음을 아들에게로 아들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려놓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 일이 언제 이루어지겠느냐는 물음이었다.
고통받는 야훼의 종(이사 42,1-7: 49,1-9:5 0,4-9: 52,13-53,12)이 예수의 메시아상임을 아직 깨닫지 못한 제자들에게는 예수의 대답은 어리둥절한 것이었다. “그렇다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아 놓을 것이다. 그런데 성서에는 어떻게 쓰여 있느냐. 사람의 아들은 많은 고난을 당하고 멸시받을 것이라고 했지 않았느냐? 사실 엘리야는 벌써 왔다. 다만 사람들이 몰라보고 그를 마구 다루었을 뿐이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예수를 세상을 바로 잡으러 온 엘리야라고 생각하던 잘못을 시정하는 단언이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예수를 세상을 바로 잡으러 온 엘리야라고 생각하던 잘못을 시정하는 단언이었다. 이 잘못된 평판은 세례자 요한의 설교와(마태 3,10-12)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그 신분을 물은 것(마태 11,3)에서 드러나 있다. 예수께서는 민중이 생각하는 다시 온 엘리야가 아니고 다니엘이 예언한 고통을 받고 죽게 될 사람의 아들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죽음과 부활은 ‘예수=메시아’상의 성서적 운명의 순서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사람들이 목 잘라 죽인 세례자 요한이 성서에 예언된 엘리야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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