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그리고 존경하올 신부님과 수도자 여러분!
금년의 부활축일은 특별한 의미를 띠고 우리 앞에 밝아왔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근대의 가장 위대한 교황 가운데 한분이신 레오 13세께서 유명한 「노동헌장」을 반포하신지 꼭 1백주년이 되는 해에 우리가 이 축일을 지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노동헌장」 가르침 더욱 발전·전파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금년을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의 해’로 선포하시고, “이로써 신자들이 회칙 「노동헌장」을 기념하는 취지에서 사회분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 관해 더욱 잘 알고 그 가르침을 발전시키며 절리 전파 하도록 당부한다”고 강조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 및 부활과도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이 문제를 두고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사회문제에 관한 가톨릭교회 가르침의 역사에서 효시를 이루고 있는 「노동헌장」은 세월이 갈수록 그 깊은 의미가 더욱 드러나기 때문에 역대 교황들께서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후속문헌을 계속 내놓으셨습니다.
역대 많은 교황들 후속 문헌 내놓아
이 문헌이 반포된 후 40년째 되던 1931년에는 삐오 11세 교황께서 「40주년」이라는 문헌을, 80년이 되던 1971년에는 바오로 6세 교황께서 「80주년」이라는 문헌을 각각 반포하셨습니다. 그리고 1백주년이 되는 금년에도 현교황의 권위아래 같은 맥락의 문헌이 곧 발표될 예정으로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라는 주제를 두고 숙고하는 것은 보편교회의 관심이 지금 이 문제에 쏠려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외에도 우리 한국의 사회 현실이 우리로 하여금 이를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기 때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황폐화돼가는 사회
우리 사회는 지금 어떤 형편에 있습니까?
아주 최근의 사건들만을 중심으로 해서 생각해보아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 뇌물 외유 사건, 일부 대학교수들의 입시부정사건, 군산의 인구 밀집지역에 주민들과의 협의 과정 없이 설치하여 현지 주민 절대 다수의 반대 운동에 부딪치고도 계속 밀어붙이는 이른바 티·디·아이 공장 사태, 그리고 돈을 얻어내기 위해서 9살 난 어린이를 유괴하여 끝내 죽여 버린 사건 등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심한 중병에 걸려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급속도로 또 속속들이 황폐화하는 사회 속에서 어디에 희망을 두고 살 것인가? 누가 손을 뻗쳐 빈사상태에 놓여 있는 이 사회의 건강을 회복시켜줄 것인가? 정치계? 종교계? 교육계? 문화계? 그 어디에서도 뚜렷한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바로 몸담고 있는 종교계는 어떻습니까?
세력 확장에 급급한 종교 방향감각 상실
1989년 말 현재 전라북도 각 종교 단체들이 주장하는 자기 교단의 신도수를 모두 합하면 3백58만여 명이 됩니다. 그런데 그 시점에 전라북도의 실제 인구는 2백15만여 명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전국 통계에서도 각 종교 단체들이 주장하는 자기 교단의 신도수가 인구 전체의 수를 훨씬 앞지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종교 일반은 서로 자기 세력의 확장과 그 과시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으며, 종교인구가 그렇게 많다고 하는 사회가 이토록 심각하게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종교계 자체가 일반적으로 크게 잘못 가고 있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기복·이기적 신앙 사회 저속화 가속
어디에 이들 종교의 잘못이 잇는 것이겠습니까? 한마디로 그것은 관심의 방향이 밖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 안에 갇혀 있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종교를 찾을 때 가장 많이 기대하는 것이 ‘마음의 평화’임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여기서 출발하여 자신의 건강, 집안의 안녕, 사업의 성공 등 요컨대 이기적 성향을 만족시키려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변에 몰려들었던 사람들도 그 대부분이 처음에는 이런 수준의 기대를 가진 이들이었고 주님께서는 거기서부터 일을 시작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으셨음을 생각할 때, 사람들이 처음 소박한 기대를 가진다고 하는 사실 자체를 과히 나무랄 필요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바른 신심지도를
그런데 문제는 많은 경우에 사람들의 그런 기복신앙적 경향을 바로잡아주어야 할 종교 지도자들마저 오히려 그런 수준의 구원을 약속하고 또 실현시켜줄 수 있는 것으로 믿게 함으로써, 종교 인구가 아무리 늘어나도 사회는 점점 더 이기적인 모습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기도를 해도 내 고통, 내 문제, 내 집안, 내 사업만을 걱정하는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요란한 종교체험을 해도 결국 자기 한 몸 속에서의 일이기가 일쑤인 것입니다. 이런 풍조는 한 종교를 집단으로 놓고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사회를 건강하게 하기보다 개인적 이기심을 집단적 이기심으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씻어버릴 수가 없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이런 틈을 타서 조악한 말세론까지 등장하여 역시 나 한 몸만이 재앙에서 빠져나갈 길을 생각하게 하는 잘못된 종교심을 한껏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자아 포기의 삶이 세상의 빛과 소금
그러나 참된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는 이런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그것은 타고난 이기적 성향과 자기 자신의 안보만을 걱정하는 식의 삶을 포기할 때, 즉 생명을 버릴 때에만 얻을 수있는 생명이며, 이기적 성향의 생명을 얻으려 하면 잃을 수밖에 없는 생명인 것입니다.
그것은 또 세상을 밝히는 ‘빛’이요, 사회를 썩지 않게 하는 ‘소금’이며, 사람들이 자기 앞가리기에 급급해 있을 때 진정한 삶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뚜렷이 보여줌으로써 세상을 인간다운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산위의 도시’인 것입니다. 빛과 소금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밝혀주고 부패로부터 구해주어야 할 주변 세계를 위해 있는 것처럼 교회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만 그 존재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참다운 종교인이면 사회 위해 헌신해야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사람의 관심을 자신 밖으로 향하게 해야 하고, 종교를 성전 안에 유폐 시키려는 유혹을 단호히 거부해야 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도 우리는 이를 잘 배울 수 있습니다. 강도를 당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한 사람을 못 본 체하고, 멀리 비켜서 지나가버린 사람은 묘하게도 종교의 전문가, 성전 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통하는 제관이었습니다.
레위인 역시 제관을 도와서 제사를 드리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요컨대 종교를 성전 안에 유폐시키고 종교인이 바깥세상 사람들의 사회에서 해야 하는 일의 종교적 혹은 신적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인간들의 표상인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죽음 사회불의항거 결과
지금 우리사회는 큰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사람처럼 위급한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만일 그것은 종교의 소관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무심히 지나치고, 이른바 종교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일에만 전념하기로 한다면 우리는 비유 속에 등장하는 제관과 레위 사람과 다를 것이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
교황 레오 13세께서 노동자의 권리, 노사간의 관계 적당한 임금 등의 문제를 거론하며 「노동헌장」을 발표하셨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교회의 고유한 영역이 아니라고 비난했고, 더 많은 사람들은 위태로운 것으로 생각하여 불안해하고 의심했으며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원이나 양로원 등 불우시설을 통하여 이른바 자선사업을 하는 것 정도가 사회문제에 관리해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까지도, 교회가 잘못된 사회구조나 제도자체를 문제 삼고 거기에 관심을 표시하면 어떤 사람들은 즉각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비난과 모함의 화살을 퍼붓곤 합니다.
개인적 안락보다 사회평화 힘써야
하지만 우리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이른바 종교 고유의 영역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 일에만 전념하고 사셨다면 사람들이 그분을 비난하고 박해하며 결국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일이 일어났을 것인가? 그분이 각 사람들에게 내면세계의 평화나 설교하고 자신의 사적 생활 문제에 깊이 파묻혀 살도록 가르치셨다면, 그분을 따르는 일과 십자가를 각오하는 일을 그처럼 긴밀한 관계로 맺어놓으실 필요가 있었을까? “나를 따르려면 누구든지 자기를 끊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는 말씀이 아직도 의미가 있었을까?
정의·개혁에의 활동 복음선포 본질요소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권위주의적 정치체제하에서 우리나라가 산업화의 과정을 급속도로 진행시키는 동안 가톨릭교회는 현실 사회문제에 나름대로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필요한 경우에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시기를 통과하는 동안 교회의 현실참여의 방법과 때로는 현실 참여 자체를 둘러싸고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걱정·우려·비판의 소리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런 비판의 소리들 가운데에는 참으로 경청하지 않으면 안 될 내용들도 있었고, 사회 정의를 위해서 투신한다는 사람들의 태도나 행동 방식들 가운데에는 재고하고 바로 잡아야 할 부분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야의 투신에는 복음을 순전히 현세적이고 인간적인 목표로 제한해 버리려는 태도, 이른바 수평주의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문제에 관한 교회 가르침의 해’를 맞이하여 몇 가지를 분명히 해두어야 하겠습니다.
먼저 사회, 정치적인 성격을 띠는 분야의 문제들이 아무리 까다롭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하더라도 신앙인으로서 그것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며, 이 문제들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은 1백년의 역사를 가진 만큼, 우리가 그 안에서 매우 현실적이고 중요한 지침을 찾아내어 응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여러 문헌들, 특히 「현대세계의 사목헌장」과 「민족들의 발전」 등 공의회 이후에 계속 발표된 이 분야의 수많은 교회 공식 문헌들은 우리에게 귀중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둘째, 이들 문헌을 통한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사회문제에 응분의 관심을 가지고 헌신하는 일은 각자의 기호나 성향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선택사항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모범으로 가르쳐주신바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와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들 문헌에 따르면 “정의를 위한 행동과 세계 개혁 활동에의 참여는 복음선포의 본질적 구성 요소임이 명백하다”(세계 주교대의원회의 제2차 총회문헌-세계 정의에 관하여-서문)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의 문헌들에 의하면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기로 하는 우선적 선택’이 전세계 모든 교회가 보편적으로 선택해야만 하는 기본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빈자에 우선 선택을
셋째, 따라서 어떤 지역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교회를 놓고 그리스도의 본래 정신에 비추어 그 건강 정도를 알아보고자 할 때, 그 가장 확실한 척도의 하나는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들, 즉 가난한 사람들, 장애자, 실직자, 노인, 즉 경제적인 시각에서 볼 때 별 의미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에게 부담만 된다고 흔히들 생각할 수 있는 흔히들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거기서 어떤 대우를 받는가?”하는 점입니다.
당신이 과연 참된 그리스도인지를 알고 싶어 했던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대답삼아 들려주신 말씀은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의 교회에서도 늘 그 진정성의척도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듣고 본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마태 11,4-5).
이런 점에서 교회가 중산층화 해간다는 최근의 사회조사 결과는 그것이 혹시 이른바 소외계층을 교회도 같이 멀리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점에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교회 중산층화 경향 소외계층 외면처사
넷째, 우리는 사회문제에 관한 교회의 참여 방식을 두고 전교회적 수준에서 이를 평가하고 반성하여 시정할 것은 시정하고 지속적으로 실천할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사회 안에서 교회가 빛과 소금, 그리고 산 위에 세워진 도시로서의 본래 역할을 뚜렷이 할 수 있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다섯째, 이를 위해서는 교회의 성원들이 사회문제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공개적으로 토론하며 자신의 의견을 자유로이 개진함으로써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진리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모색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교회는 그동안 가끔 냉철한 반성의 겨를이 없이 추진해왔던 현실 참여 과정에서 저질렀던 실수나 과오들을 만회하고 한층 더 성숙한 자세로 본연의 사명을 다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삶이면 부활은 무의미해져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영세자, 사제와 수도자 성소의 증가, 그리고 물질적 풍요 등으로 인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늘 앞으로 나아가야 할 순례자로서의 자기 처지를 망각하고 어딘가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인간적 경향 쪽으로 밀려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와는 인연이 먼 교회의 모습을 띠어가고, 교회 자체의 테두리 안에서 불편 없이 사는 데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삶의 모습 속에서 그런 면들이 있었다면 그 형편을 그대로 둔채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는 일은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따르는 그리스도는 누구이며 어떤 길을 가신분입니까? 그분은 당대의 종교인들로부터는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으로, 정치가들로부터는 정치적 선동가로, 사회의 점잖은 사람들로부터는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으로, 민중들로부터는 자기들의 기대를 채워주지 않는 거짓말쟁이로 몰려, 결국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죽어가신 분입니다.
그분께서 걸어가신 그 길은 부활을 향한 도정에서 빼놓을 없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십자가 없는 부활은 씨 뿌리지 않은 수확만큼이나 불가능하고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께서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1코린 1,23)그리고, 이틀 늘 기억하기 위해서 미사 때마다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전하며 주의 부활하심을 굳게 믿나이다”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고통·불편감수 감수할 때 부활의 새 생명 체험
사회 문제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의 해인 금년부활을 기해서 우리가 자신만을 맴도는 관심의 테두리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처럼 이웃과 사회를 향해 눈길을 돌리고, 거기 따르는 불편과 어려움을 감수하기로 할 때, 우리는 참으로 부활하신 분의 생명을 자신 안에서 느낄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지금도 이 세상, 이 사회에서 계속 살아 그 빛을 발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부활하신 분의 인사가 세상 사람들이 쓰는 의미와는 다른 그 특유의 힘과 뜻을 가지고 우리 안에 울려 퍼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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