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패인 할머니의 주름살은 임종하는 일들의 벗으로서, 고통받는 이들의 다정한 이웃으로서 70평생을 살아온 사랑의 훈자이다.
엄연섭(루치아·72세·춘천 죽림동본당) 할머니는 28세 때부터 염·수시·입관 등의 장례봉사와 전교활동에 앞장서면서 춘천지역 교회의 산증인으로서 꿋꿋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봉사활동을 하는 데는 3가지 조건이 맞아야 합니다. 성당 가까이에 집이 있어야 하며, 일용할 양식이 있고, 식구가 단출해야지요”
루치아 할머니는 이러한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자신이야말로 봉사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모든 일에 모든 것이 되어주며 남의 말 하지 말고 잘 입지도, 먹지도 말며 진리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고, 죽은 사람 장사할 지내 영혼을 구해주라」고 가르친 부친의 생활신조를 받아들여 루치아 할머니는 검소하고 성실하게 생활하면서 숨은 봉사활동을 해왔다.
엄루치아 할머니의 부친 고(故) 엄주언(말딩)은 죽림동성당의 설립자이며 춘천지역에 신앙의 기초를 다진 장본인이다. “한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것은 온천하를 얻는 것과 같다”는 부친의 가르침을 따라 젊었을 때부터 불쌍한 사람, 버림받은 이웃 그리고 임종을 맞이하는 이들을 찾아 나선 루치아 할머니는 44년간을 한결같이 장례봉사에 앞장서 왔다.
자신에게는 항상 ‘죽음의 냄새’가 따라다니는 것 같다고 말하는 루치아 할머니가 80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간 염을 한 시신의 수는 2백17구에 이른다. 모두 할머니의 손으로 닦여지고 묶여지고 관속에 눕혀져 영원한 안식의 길로 떠난 이들이다.
루치아 할머니의 하루는 새벽 4시 40분경 죽림동성당의 문을 열면서 시작된다. 아니 할머니의 하루는 만물이 잠든 새벽 3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시작된다. 할머니는 정성된 새벽기도로 하루를 연다.
아직도 그 옛날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지어서 바쳤던 ‘일비선정경(임종경)’을 바치는 할머니. 옛날의 조과는 물론 요즈음 신자들에게는 생소한 ‘예수성심이 받으시는 능욕을 기워 갚기로 영하는 기도’ ‘예수성심께 마음을 드리는 경’ ‘예수성심께 천하만민을 바치는 경’ 등 어릴 때 부친과 함께 바쳤던 기도를 아직도 잊지 않고 바치고 있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칠순이 넘은 노인의 목소리답지 않게 낭랑하다.
죄인의 회개가 이 세상을 위해 바치는 할머니의 기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새벽의 찬 공기를 가르고 성당 문을 연 할머니는 새벽미사가 봉헌되는 6시까지 발이 시린 것도 잊은 채 십자가의 길·묵주기도·성체조배 그리고 기도서의 특수기도를 끝까지 다한다.
또 루치아 할머니는 30년간을 성당을 올라가는 언덕길을 청소하며 온갖 꽃과 나무들을 정성스레 키우고 가꾼다.
“대통령이 사는 청와대 주변이 얼마나 깨끗합니까? 하물며 성전은 주님이 머물고 계시는 곳인데 항상 깨끗하게 청소해야지요.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철이나 눈이 녹을 때면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루치아 할머니는 기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하는 신앙인이기도 한다. 그의 집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항상 열려있으며 특히 성직자와 신학생을 돌보는 일을 겸손되이 행하여 왔다.
“군종교구장 정명조 주교가 춘천에 군종신부로 머물러 계실 때 집에 모셔 정성껏 수발을 해 드렸다”고 말한 루치아 할머니는 그때를 회상하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할머니의 이 같은 봉사행로 뒤에는 자신만의 고통이 크게 동아리져 있다. 하느님은 남들에게 다 허락해주신 자녀를 루치아 할머니 부부에게는 허락지 않았다.
30세에 아들 하나를 입양했고 43세에 딸을 입양해 키우면서 남다른 사랑을 쏟았고, 생활 속에서의 고통을 잊기 위해 더욱 봉사활동을 열심히 했다. 40여 년간의 장례봉사가 몸에 배인 탓인지 할머니는 움직일 수 있는 그날까지 초상집과 불우 이웃을 찾아 나서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엄연섭 할머니의 금년 사순절은 유난히 고통스럽다. 50여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 권태진(가를로)씨가 얼마 전 갑작스레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임종의 순간을 보지도 못한 채 길거리에서 쓰러져 자는 듯이 눈을 감았단다.
루치아 할머니는 고혈압이던 남편이 별다른 고통 없이 하느님 품에 안긴 것이 평생을 바쳐온‘일비선정경’ 덕분인 것 같아 더욱 감사한다.
평생을 검소하게, 절제된 삶을 살다가 간 남편을 위한 연도도 할머니의 몫이다. 1백일 연미사를 봉헌해 놓고 있지만 자신의 봉사활동을 뒤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던 남편의 빈자리는 할머니를 더욱 서럽고 외롭게 만든다.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고통에 비하면 자신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루치아 할머니는 묵주를 힘차게 돌리면서 또 불우이웃을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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