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점칠 수 없는 삭막하고도 어두운 현실 속에서 어김없이 새해의 첫날이 밝아온다. 연일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초강력 사건으로 인해 언제, 어느 때 자신의 생명과 가족의 행복을 빼앗길지 모른 채 전전긍긍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속에서 교회는 희망의 불을 지펴야할 때이다. 91년 새해아침, 본보는 작은 등불을 켜들고 어두운 세상을 향해 밝히며 살아가는 이들을 찾아 나섰다. 30년을 뱃사람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사람 낚는 어부가 되고자 노력하는 임순오씨(필립보)와 억압받는 여성들에게 희망의 불을 당겨주며 25년을 한결같이 살아온 가정법률상담소 부소장 차명희씨(요안나). 이들의 등불이 사회 구석구석에 비춰지길 기대해본다. <편집자 주>
어둠을 젖히고 동해 앞바다에 91년 새 아침의 해가 떠오른다.
농촌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대처로 나가고 없는 바닷가 선착장에는 젊은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수척의 배들이 햇살을 받으며 꿈틀거린다.
그러나 이미 해가 솟기 훨씬 전에 출항한 배들은 수평선위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그물을 치는 등 힘찬 하루를 시작했으며 선상에서 새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파도와 사우며 바다에서 삶을 꾸려가고 있는 뱃사람 임순오(필립보·54)씨. 그 바삐 움직이는 배들 가운데 홀로 배를 조정하며 낚싯줄을 드리우던 임순오씨는 새해 첫날 저 멀리 수평선너머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가장 먼저 접하고 묵사에 잠겼다. “주여! 지난해의 과오와 불성실했던 신앙생활을 용서해주소서. 그리고 금년에는 당신의 아들로 새롭게 태어나는 한해 되게 이끌어주소서”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은 임씨의 얼굴은 오랜 세월 모진 풍파와의 싸움을 이겨낸 강인한 뱃사람 그 흔적이 담겨있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임씨는 30여 년 전 군제대후 우리나라 동어장의 전초기지인 묵호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 지금까지 어업을 천직으로 생각하며 살아오고 있다.
묵호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강원도 동해시 사문동 해변가 언덕, 조그만 집에서 부인과 자녀와 함께 살고 있는 임씨는 ‘문어’를 주로 잡으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잠을 자고 있을 새벽 4시가 채 못 된 시간. 임씨는 자전거에 도시락과 어구를 실은 뒤 한손에는 묵주를 쥐고 한 겨울의 싸늘한 공기를 가르며 어둠을 헤치고 선착장으로 향했다.
잠시 후 선착장에 도착한 임씨는 자신의 1.5톤 ‘통통배’를 둘러보고 선상에서 아침기도를 한 뒤 배의 시동을 걸고 공장 바다로 나갔다.
평소 저녁 10시경 취침하여 새벽 4시에 기상하는 임씨는 이날따라 전날 손실된 어구를 새로이 장만하느라 새벽 2시경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수면부족이 유난히 발걸음을 무겁게 하지만, 그의 배는 수평선 쪽으로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묵호항에서 30분가량 떨어진 바다 가운데 도착해 닻을 내린 임씨는 평소와는 달리 작업에 임하기 전에 묵주기도 5단을 바치고 잠시 묵상에 잠긴 후 낚시 40여개를 바다에 드리웠다. 문어가 아니라 냉담자와 비신자들이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기원하면서.
어부들은 남달리 미신을 신통한다.
그날 하루에 기상상태에서부터 잡히는 고기량과 사소한 일에까지 촉각을 곤두세우는 그들의 삶속에서 떼어낼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어분들은 바다의 평온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를 가장 큰 신앙행위로 생각하고 있으며 모든 배에는 재앙을 막는다는 뜻으로 성주 (부적)를 달고 다닌다.
또 어부들의 삶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그들은 매일을 바다에 목숨을 담보로 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기 때문에 그날그날을 술과 도박으로 방탕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짭짤한 수입만큼이나 풍족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폭풍으로 인명피해가 발생했거나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고 귀항한 경우에는 심한 허탈감을 느끼며 타락의 길로 빠져들곤 한다.
이러한 이유와 함께 일정한 귀항시간 없이 바다에서 살아가고 있어 어부들 중에는 신자 수가 적을뿐 아니라 그 몇 안 되는 신자들도 냉담의 길을 걷게 되는 상황이다.
특히 묵주를 소지하거나 기도하는 것을 동료들에게 목격당했을 경우 ‘바다가 노해 재앙이 따른다’는 이유로 욕을 듣거나 따돌림을 당하게 돼 기도도 마음 놓고 할 수가 없다.
이 같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임씨는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바다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막간을 이용해 가끔씩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다”는 임씨는 “그러나 다른 동료들에게 이러한 기도장면을 목격당하면 싫어하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게 기도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또한 임씨는 “어촌에는 명절 등을 비롯 제사지내는 일이 많다”면서 “이러한 미신적인 행위가 행해지면 혼자 떨어져 나와 배를 씻으며 기도한다”고 말했다.
기상상태가 악조건을 때를 제외하고 거의 매일 새벽에 바다에 나가는 임씨는 주일의 경우 저녁에 미사 참례를 하고 있으며 미사시간에 맞춰 귀항하지 못할 때에는 대송(주의기도 33회)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해변에 위치한 본당의 경우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어부신자가 거의 없으며 임씨가 속한 묵호본당에도 어부신자는 겨우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정도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고독한 어부’가 될 수밖에 없는 임씨. 그는 91년 새해 첫날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만물의 주님이신 주님을 찬미하고 고기 잡는 어부이면서 주님께 불림받은 베드로와 같이 ‘사람낚는 어부’가 될 것을 다짐 했다.
뱃사람 임순오씨는 ‘새해에는 더 많은 고기가 잡히길’ 기원하는 것만큼이나 많은 것을 기도하고 있다.
“주님, 내일에 대한 희망과 믿음 그리고 빛나는 새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그 숱한 험난한 날들을 헤쳐 나왔습니다. 새해에는 주님의 품 같은 바다에서 고기뿐만 아니라 당신께 불림받은 베드로와 같이 바다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게 이끌어 주소서. 그래서 새해에는 바다위에서 당신을 찬송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많이 태어나도록 도와주소서”
“또한 새해에는 더 많은 고기가 잡히도록 도와주시고 아울러 동료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도록 도와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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