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버리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휴가 때가 되면 고향에 가고 싶어진다. 고향에 가도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형제들은 일 따라 헤어져 살지만, 살아생전 효도 못한 딸이라 부모님 사셨던 곳으로 발길이 닿았다.
굽은 허리 반으로 접으시고 당신 곁을 떠나는 딸을 배웅하러 한길까지 나오셨던 노모의 흐린 눈빛을 보고 “내년에 또 올게요. 수녀의 어머니가 울면 사람들이 흉봐요”라는 못난 소리를 서슴없이 했던 철부지인 딸.
성모님의 마음을 조금은 알아들을 것 같았다. 미쳤다고 소문이 난 예수를 찾아 헤맸던 성모님, 누가 내 어머니며 형제냐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 내 형제며 어머니라 하셨을 때 성모님은 섭섭하셨을까?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가 끝내는 딸 때문에 아가다 본명으로 아버지는 바오로 본명으로 대세를 받으시어 평화 가운데 운명하셨다. 저 세상 가는 길은 수녀인 딸 손에 당신 몸을 맡기어 염을 했다. 주위 사람들이 어머니를 부러워했고 내 딸은 왜 수녀원에 못 가는지 모른다고 했다. 초상 때 왔던 작은 집 식구 12명이 영세했다. 하느님께서는 함께 있는 자에게도 축복을 내리셨다.
어머니께는 내가 휴가를 얻어 집에 들리면 가을 햇볕에 호박, 고구마 줄기, 무를 썰어서 말려 다락에 매달아 놓았다가 친정 왔다가 가는 딸처럼, 싸주셨다.
어머니의 사랑이 배어있는 고향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어도 끝없이 나를 부르곤 했다. 한번은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 갔다. 40여 년 전 내 모습을 찾아 교실을 기웃거리다가 놀러왔던 아이들의 의아한 눈망울과 마주쳤다. “응, 나도 이 학교에 다녔단다” 묻지도 않는 소리를 혼자 대답하면서 비린내 풍기는 부둣가로 나섰다. 이곳은 휴가 중 꼭 찾는 곳이다. 울긋불긋 기를 단 고깃배, 파도를 타고 나는 갈매기, 짭짤한 소금기와 산처럼 쌓인 꼴뚜기·게·조기 등등… 많은 생선들이 다투어 나를 반겼다. 고기를 먹고 싶어 아팠던 수련소 생활 주방 수녀님의 따뜻한 배려로 먹고 싶은 것 먹고 살아났던 일, 고양이 수녀가 된 것은 항구에서 자란 탓이라. 이젠 식성도 다 변해서 휴가 왔어도 집 음식은 한 두 끼 정도면 그만이다. 짐을 꾸리는 내 모습이 야속한지 가족들이 물었다. “아니, 벌써 갈려고?” 희미한 기억들을 책갈피에 넣듯 차곡차곡 기도 속에 넣었다.
“나의 집은 수녀원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