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어두움 한자락을 잘라 묵시의 예언복을 마련해 입은 여인, 지는 해 회색빛 노을 접어 세월을 다림질하는 여인, 한 아이의 어머니도 아니면서 수천의 어머니로 사는 여인, 배 아파 낳은 자식 없어도 하루에도 수십 번 배 아프고 가슴만 철렁 내려앉는 여인, 여인이면서도 아기를 보듬으면 이상한 눈으로 보이는 여자, 밖으로 밀려난 여인, 가진 것은 없어도 늘 부족함이 없고 웃음이 너무 헤퍼서 입을 막기 전에 하하 호호 쏟아버리는 여인, 오직 예수님 사랑 하나에 평생을 매달아 놓고 검은 머리 흰 서리 내려도 마냥 어린이처럼 가슴 뿌듯한 여인, 이러한 수녀로 나는 하루하루를 생활한다.
어느 날 숙이가 하늘색 손수건을 꺼내더니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접어논 부분을 탁탁 털어 펴서 내 머릿수건(슐라이어)처럼 흉내를 내었다. 툭 튀어나온 이마를 약간 가리고 양손을 뒤로 보내며 묶으려는 동작을 했지만 손수건이 약간 짧았다. 다음 날은 좀 더 큰 것을 가지고 와서 내 머리 모습을 곧잘 흉내를 내었다. 너도나도 손수건 한 장씩 꺼내서 머리로 가져갔다. 흔히 1학년 어린이에게 일어나는 모방심리다.
대대로 내려오는 불교집안인 숙이가 엄마따라 절에 가서 일으킨 사건은 귀엽다 못해 얘가 정말 수녀가 되려나보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부처님 앞에서 합창을 한 숙이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불당이 떠나가게 큰소리로 성호기도를 하더니 절을 시작했다. 스님도 웃으시고 신도들 보기가 민망스러워 숙이의 행동을 제지하려니까 어느 틈에 “대자 대비하신 부처님”으로 시작하여 한참 후엔 “이 모든 것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으로 끝났단다.
맹모삼천지교라더니 성모 학교에 와서 하느님의 존재를 제대로 배우고 모든 사람 앞에서 신앙을 선포까지 했다.
16년이란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새벽 미사 후 아침 체조시간에 수녀원 성당탑 꼭대기에서 까치가 깟깟-소식을 전했다.
숙이의 결혼 청첩장이 날라 온 것이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고 인사차 왔다간 날이 엊그제 같은데 깜짝할 사이에 세월이 흘렀나보다.
순간 숙이가 이룰 성가정을 위한 9일 기도를 바쳐야겠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부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