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은 서둘러 암스테르담 구경에 나섰다. 첫 번째로 찾아 나선 곳은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의 집이었다. 나치에 쫓긴 안네가족 일가가 게슈타포에게 잡혀 수용소로 보내져서 죽기까지 살았던 곳이었다.
항간에는 관광수익을 위해 누군가에 의해 ‘안네’가 꾸며진 인물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한반도처럼 가슴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안네 프랑크의 집은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7길더(3천5백원) 라는 어마어마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다. 안네가 쓰던 침대라든가 책상 따위들을 기대했건만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유명한 ‘안네 프랑크의 집’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집만 달랑 있는 건지 속은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오히려 기념품점이 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그것이 명소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나의 모습이 하느님이 보시기에도 불쌍하게 보였던 것인가. 역 광장에서는 콜라 무료 시음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주머니가 빈곤한 배낭여행자의 신세로써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침햇살과 함께 도착한 코펜하겐은 참 편안해 보였다. 더욱이 세계 최고 복지국가답게 모든 나라에서 돈을 받고 있는 화장실조차 무료였다.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여태까지 참았던 오줌을 이곳에 쏟아내듯 마음껏 화장실을 출입했다 “아 시원해. 역시 잘살고 볼일이야”
나는 우선적으로 안데르센이 어렸을 적 ‘내가 커서 이 마을을 유명하게 하겠다’고 다짐했다는 그의 고향 오덴세로 향했다. 코펜하겐에서 기차로 3시간 남짓 걸렸다. 기차로 여행을 시작한 이래 내가 탈 기차가 확실한지를 두 번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차장에게 다가가 오덴세행이냐고 다시 물었다.
“예, 오덴세 행이에요. 그런데 예약은 하셨나요?” 예약이라니? 그 비싼 예약비를 어떻게 감당하라고 더군다나 밤기차도 아닌데 웬 예약! 나는 당황해서 머리를 내저었다. 그러자 그는 “자리가 없을 텐데”했다. 유럽의 기차는 입석이 없다는데 자리가 안 나서 오덴세를 못 가게 된다면 낭패였다. 나는 그 차장아저씨에게 온갖 아양과 협박을 했다.
차장아저씨는 예약을 한 사람들이 자리에 다 앉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출발 직전까지도 자리가 나지 않자 그 차장은 보조의자를 내주면서 여기라도 좋으면 앉아 가라고 했다. 지금 보조의자 따질 때가 아니었다.
유치원 아이들이 벽에다 낙서해 놓은 것 마냥 재밌는 기차 안쪽 벽의 그림 장식이나, 몇 시 정도에 다음 정거장에 도착할 것이라는 전광 안내판은 칼보다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오덴세에는 예상했던 시간대로 정시에 도착했다. 거리에 웬 사람들이 그렇게도 안 보이는지. 와, 정말 집들도 오밀조밀하고 기념품을 파는 상점들조차 동화 속에 나오는 그림 같았다.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생각만큼 안데르센 마을이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느릿느릿 구경한다고 해도 30여 분을 넘기지 않았고 그나마 온통 기념품점으로 둘러져 있었다. 그저 동심으로 가꾸어져야 할 동화의 나라가 상품화되고 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팠다.
코펜하겐 중앙역 앞에는 티볼리 공원이 있다. 여기는 어른들의 유원지로 벌써 여기저기 벤치에는 노인들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얼마나 넓은지 처음 가는 사람들은 안내용 자동차로 한 바퀴를 돈 다음 자기가 가보고 싶은 곳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코펜하겐에 왔다면 뭐니 뭐니 해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어공주상이다. 나도 예외 없이 인어공주상을 보러 나섰다.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인어상은 많은 관광객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서로 인어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난리들이었다. 몇 년 전 한쪽 팔이 잘린 인어상의 복구작업이 있었다. 한쪽 팔을 되찾은 인어상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회수의 사진을 찍은 모델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하잘것없이(?) 작은 것도 유명세를 타니 대단한 것이 되는구나 생각하니 우리나라의 낙후된 관광산업이 아쉽기만 했다. <계속>
[구미리내의 세계 배낭여행기 유럽, 그 웅대한 역사를 따라] 5 복지국가 덴마크
승무원 협박(?) 겨우 열차표 구해
안데르센 고향·인어공주상 관광
발행일1993-12-12 [제1884호, 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