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매일 죽음을 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지막 안식처를 찾아오는 하느님의 자녀들의 곁에서 그들이 하늘나라로 떠나는 길을 지켜주고 있다는 데에 커다란 의미를 갖고 묵묵히 일해 왔습니다”
지난 1982년부터 천주교 인천교구 하늘의 문 묘원에서 11년째 근무하고 있는 정기춘(베드로·65세)씨의 모습에는 마치 속세에 섞여 사는 구도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황해도 해주 벽성군 대거면 은동리가 고향인 정씨가 인천교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상의용사로 제대해, 58년 세례를 받게 되면서부터였다. 정씨는 59년부터 지금까지 34년 동안 안 주교관 식복사, 교구청 직원을 거쳐 일해 오고 있는 인천교구의 산 증인.
매일 매일 죽음을 접하면서도 그에게는 항상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교구 묘지에 묻히는 신자들의 천당길을 밝혀주고, 문상객들의 아픔을 달래주는 일을 해 오는 정씨는 자신도 모르게 구도자가 되고 있다.
30년이 넘도록 어김없이 새벽미사에 나가고 있는 정씨는 “하루의 첫 일과를 죽은 영혼들을 위한 기도를 하면서 시작한다”며 “매일 매일이 죽음을 준비하며 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삶”이라고 강조했다.
김포군 건담면 당하리 산152번지에 위치한 인천교구 묘지, 그리 가깝지 않은 거리를 매일 출퇴근 하면서 정씨는 늘 죽음에 대한 묵상을 하고 있다.
“성서에 마음이 가난한 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씀을 늘 실감한다”고 토로하는 정기춘씨는 “묘지에 오는 이들 중 선하고 죽음을 스스로들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뿐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가난한 이들”이라고 밝힌다.
전쟁의 쓰라린 피해자인 정씨,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혀 숱한 고문을 받았고, 이들로부터 탈출에 성공, 다시 군에 입대했고 전쟁의 고통을 짊어지고 사는 정기춘씨는 한때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인천에서 구걸로 목숨을 연명하기도 할 만큼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다.
세례를 받고, 주교관과 교구청의 허드렛일부터 지금의 묘지기까지 한길을 그저 묵묵히 살아온 정씨에게는 남들보다 삶에 대한 여유가 있다. 죽음을 접하며 살기에 웃음보다는 울음에 익숙한 그에게 남들보다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를 가능케 했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맞는 사람이나 이를 지켜보는 이들은 모두 그 순간만큼은 선해진다”고 말하는 정기춘씨는 “주님께서 세상에 우리를 보내셨듯이 주님이 필요할 때 다시 우리를 데리고 가는 것이 죽음이기에 두려워할 것도 없고, 그저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을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이라며 겸손한 미소를 지었다.
또한 “동갑내기들이 속속 묘지에 오는 것을 보면서 내 차례도 그리 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며 산다”는 정기춘씨. 그래서 죽은 영혼들을 매일 떠나보내는 정씨의 손에는 더욱 따스한 사랑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주교좌 본당의 전례부장으로서 아버지 레지오, 복사단을 창단하는 등 전례에 남다른 애정을 보이고 있는 정씨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장 기쁜일은 “전통전례를 고집하는 주교님의 복사로서 대미사를 드릴 때”라고 회고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는 성서구절을 삶으로 살아가는 정기춘씨. 황혼이 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묵묵히 일하고 있는 정씨의 뒷모습에는 마치 오랜 수도(修道)생활을 하고 있는 구도자의 경건함이 배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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