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1990년 1월 미국 캘리포니아주와 하와이 30일간 여행. 1992년 7월 홍콩, 대만, 싱가포르, 태국 등 동남아 30일간 여행. 1992년 12월 인도, 네팔, 방글라데시, 필리핀, 홍콩, 마카오, 태국 등 70일간 여행. 1993년 6월 영국을 비롯한 유럽 전역과 이스라엘, 터키, 이집트, 키프로스 등 20여 개국 60일간 여행. 1993년 12월 남미 도전 계획. 현재 숭의여자전문대학 문예창작과 2학년 재학 중.
배낭 하나로 세계를 헤집고(?) 다닌 지 어언 2년째로 접어들었다. 열심히 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는 몽유병처럼 돋아지는 여행병(?)이 이제는 치유되었나 보다 하고 안심을 하곤 했다.
하지만 방학이 다가오면 근질거리는 내 역마살은 어김없이 배낭 하나만 메어준 채 어디론가 내보내고 있었다.
홍콩, 인도, 네팔, 필리핀, 태국…… 쉼 없는 여행으로 나는 어느새 내 자신이 작은 철학자 같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이번 세 번째 여행으로 다녀온 곳은 역사와 문화의 거대한 나라, 유럽과 신비한 베일에 싸여 춤을 추는 중동이었다.
예술의 도시 파리와 집시와 깊은 역사가 같이 숨 쉬는 로마, 팔레스타인 문제로 여자까지 군대를 간다는 이스라엘과 피라미드의 나라 이집트 등등 모두 20여 개국, 생각만 해도 설레는 매력이 넘치는 곳들이었다.
유럽은 여행자들이 많아서 그렇다손 치더라도 여자 혼자 중동을 간다니까 부모님은 물론이고 많은 주위어른들은 고개를 내둘렀다.
납치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중동전쟁 일어나서 포로 되면 어쩌느냐. 당체 위로나 용기를 주는 사람은 없고 순 겁만 주는 말들뿐이었다.
하지만 작년 겨울, 종교 싸움으로 난리였던 인도여행도 멋들어지게 해냈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런 하찮은 말들에 포기를 했었다면 지금의 구미리내는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한 달이라는 짧은 준비기간, 경비 조달하랴, 학교 공부와 미미한 중동 여행정보 수집하랴,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래도 시간은 후다닥 지나 6월27일. 드디어 대망의 유럽ㆍ중동여행을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설레는 가슴으로 네덜란드 항공편으로 내 유럽여행의 첫 목적지인 런던을 향해 떠났다.
16시간이라는 긴 비행시간 끝에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에 내린 시간은 밤늦은 10시30분경이었다. 무사히 입국심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이미 시계바늘은 1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얼마동안을 바보처럼 헤매다가 겨우 공항 지하에 있는 지하철을 타고 내가 가기로 정한 숙소가 있는 얼커어트 역에서 내렸다.
인적이 거의 드문 어두운 거리에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숙소를 찾아가기란 정말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이사람 저사람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물어 겨우 찾아간 학생숙소는 3년 전 폐쇄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것이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이었나? 정말 정신병자처럼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발걸음을 돌리며 이제는 어떡하나 생각해봤지만 노숙을 하는 길밖에는 없었다. 앞이 캄캄했다. 시차도 바뀌어서 어리둥절한 시간, 딱딱한 마루에서는 못잘 망정 이슬이 촉촉이 내려앉은 잔디밭에서 자야하는 꼴이…
그때였다. 길 건너편, 환하게 불이 켜진 채 창문이 열려있는 YWCA 사무실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정말 죽으라는 법은 없나보다. 막 달려가 보니 현관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모른척 사무실에 앉아있는 할아버지에게 무언가 애걸을 한끝에 다행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마루바닥이라도 좋으니 하루만 재워달라는 나를 할아버지는 6개월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다는 말로 거절했다. 그리고는 근처의 유스호스텔이 문이 열려있을 텐데 그리로 가보라는 것이었다.
구세주보다 더 반가웠으나 고맙다는 말도 잊은 채 그 곳을 빠져나와 유스호스텔을 찾아 나섰다. 12시가 훨씬 넘은 시각이었음에도 문은 다행히도 열려 있었다.
이렇게 해서 겨우 침대를 배정받고 쓰러져 집을 그리워할 사이도 없이 잠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시차 때문인지 1시간마다 깨긴 했지만 나는 배낭 여행지에서의 첫 꿈을 꾸기 시작했다.
<계속>
[구미리내의 세계 배낭여행기 유럽, 그 웅대한 역사를 따라] 1 설레는 미음으로 런던을 향해
주변 만류에도 불구 여행준비
역사와 문화의 나라 유럽 출발
발행일1993-10-10 [제1875호, 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