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와 구원론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이단에 대항하여 ‘로고스’(하느님의 말씀 성자)의 천주성을 역설하면서 뜻깊은 구원론을 피력한다. 이 구원론은 그리스도의 육화와 직결되어 있다. ‘말씀께서는 우리를 신성에 참여 하도록 하기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되셨다. 우리가 직접 볼 수 없는 하느님께 대해 개념을 가질 수 있도록 그분은 육신을 취하신 것이다. 또 우리가 하느님의 불사불멸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분은 인간의 수모를 달게 참아받으셨다’(말씀의 강생론 54).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이신 말씀은 불사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에 죽을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래서 말씀은 육신을 취하여 모든 이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분이 되셨고, 인간은 그 말씀을 통해 불사불멸과 부활의 은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말씀의 강생론 9).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죽음이 인류 구원을 위하여 필수적인 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죽음과 부패에 속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분은 인성을 취하시고 자신의 몸을 성부께 바칠 제물로 죽음에 부치셨다. 따라서 죽음은 결국 그분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게 되어 더 이상 죽음의 세력이 인간을 짓누르지 못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그분은 인간에게 죽음을 몰아내시고 부활의 은총을 주심으로써 잃어버린 불사불멸성을 되찾아 주셨다’(말씀의 강생론 8). 아타나시우스는 성자의 천주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이단이 그리스도교의 구원신비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스도론
아타나시우스는 강생 이후의 그리스도에게 제기되는 문제 즉 그분의 신성과 인성 사이의 역학적인 관계를 언급하면서 이 둘의 위격적(位格的) 일치를 강조한다. ‘하느님의 말씀께서는 사람이 되신 후에도 계속 말씀으로 계신다. 한편 동정녀가 태초부터 계신 말씀을 잉태하셨으며 그래서 주께서 사람이 되셨다. 이 두 가지 정의(定義)로 표현된 분은 한 위격 안에 계신다. 왜냐하면 말씀이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분의 신성과 육화에 관한 설명은 각각 그 문맥에 따라 구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 그분이 흘리신 눈물은 인간으로서의 동정심을 나타내는 것이며 라자로를 부활시키신 것은 하느님으로서 능력을 발휘하신 것이다. 그분이 비록 빵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실 수 있었으나 인성을 지니셨기 때문에 친히 배고픔과 갈증을 느끼셨다. 그분은 인간이시기 때문에 무덤에 묻히셨지만 또한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 육신을 부활시키신 것이다’(디오니시우스의 어록에 관한 서간 9). 그분이 하느님으로서 하셨든지 인간으로 하셨든지 모든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한 위격(位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 한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긴밀하게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신성에 속한 특성들을 인성에 적용시켜 말할 수 있고 또 인성에 속한 특성들을 신성에 적용시켜 말할 수 있는 소위 ‘신인 속성 교환’(神人屬性交換)의 이론이 나온다. 이 이론에 따라 마리아는 비록 인간 그리스도를 낳으신 어머니지만 낳으신 그 아들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모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 안에 로고스는 신성을 나타내는데 그분의 인성은 영혼과 육신을 모두 포함한 것이냐(로고스-인간 그리스도론) 아니면 육신만을 말하는 것이냐(로고스-육신 그리스도론)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런데 아타나시우스의 저서들에서 그리스도의 영혼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아타나시우스가 로고스-육신 그리스도론을 따르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가 저술활동을 할 당시에는 그리스도의 영혼문제가 신학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아타나시우스가 이 문제로 단죄받았다는 역사적 증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성령론
아리우스이단에 의하면 성령은 성부의 피조물인 로고스에 의해 창조된 첫번째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성자보다 하위의 존재이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성령께서 성자와 똑같이 성부와 동일한 본성(homousios)인 천주성을 지니고 계시며 우리에게 성화(聖化)의 은총을 주시는 분이라고 역설한다. ‘제3자로부터 성화될 필요가 없는 존재는 스스로 성화의 주체임이 명백하다. 따라서 성화의 주관자는 결코 성화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도우심으로 신성에 참여하게 되었다면 성령께서는 결코 피조물에 속하지 않으며 오히려 하느님의 본성에 속한 분이라는 사실이 명백하다. 따라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물러 있으면 결국 신격화 하는 것이다. 그분이 신격화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데 누가 감히 그분의 신성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세라피온에게 보낸 서간 1,23). 사실 아타나시우스 이전의 교부들은 성령에 대해 별로 거론하지 않고 다만 성삼론에 곁들여 간접적으로 언급하였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이단에 대항하여 성령께서 신성은 물론 성삼위 안에 동일한 본성을 지니신 분이심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또 성령은 성삼위의 생명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하느님의 능력이시다. 이러한 성령론은 까빠도키아의 3대 교부들(바실리우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우스, 니싸의 그레고리우스)에 의해 더욱 발전되어 콘스탄티노 폴리스 공의회(381년)에서 신앙신조로 공포되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