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 실천 작품들
이집트의 나일강 주변 사막에는 3세기부터 수많은 은수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이미 청년기에 수도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은수자 성 안토니우스(250~356년)를 직접 만나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3차 유배시에는 이집트 수도자들과 함께 6년간을 지냈었다. 이러한 관계로 아타나시우스는 ‘은수자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성 안토니우스의 전기」를 저술하였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하느님께 봉헌된 이상적인 삶의 형태를 제시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한 성인의 구체적인 삶과 모범을 통해 완덕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깨우쳐 준다. 그래서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우스는 이 작품을 “이야기를 통해 제시된 수도자의 규칙”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 작품은 375년 에바그리우스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 되어 서방교회의 수도생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교회역사 안에서 수도자들에게는 물론 일반 신자들에게도 널리 읽혀왔다. 그리고 우리나라 말로도 번역되어 있다(사막의 성인 안토니오, 크리스챤 출판사, 1986).
한편 예로니무스는 아타나시우스가 ‘동정’(童貞)에 관한 여러 저서들을 썼다고 증언한다. 그 중에 한 「동정론」은 그리스도교적 동정관의 원칙과 규범을 제시하고 있는데 수덕사(修德史)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저서이다. 또 다른 「동정론」은 은수자적 삶을 살지는 못하지만 자기 집에서 지킬 수 있는 동정의 삶에 대해 언급한다. 이런 동정녀들은 그리스도께 봉헌된 그분의 신부(新婦)이며 온갖 세속적 욕망을 끊고 침묵과 성서독서와 시편기도와 노동을 통해 자신을 성화시켜 나가면서 ‘천사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라고 말한다. 그 외 다른 「동정론」 「동정녀들에게 보낸 서간」들이 여러 개 있다.
서간들
아타나시우스는 많은 서간들을 남겼는데 사적(私的) 서간은 없고 모두 공식문서의 성격을 띤 것들이다. 그 유형별로 분류하면 신자들에게 부활대축일을 준비시키기 위한 축일서간, 지역회의의 결정사항을 타교회에 알리는 서간, 총주교좌 내에 발생한 현안문제에 대해 주교들에게 알리는 회람서간, 교의적 성격을 띤 특별 서간 등이 있다. 3세기부터 시작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들의 전통에 따라 아타나시우스도 주교직 동안 매년 부활축일 서간을 보냈는데 329년에 보낸 서간에서는 10일간의 재계를 말하고 있으나 330년부터 보낸 서간들에서는 6주간의 재계를 말하고 있어 40일간의 사순절이 이때부터 알렉산드리아 교회에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367년에 보낸 ‘제39서간’은 신약성서가 27권임을 공표한 첫 번째 교회문서이다. ‘루피아누스에게 보낸 서간’은 362년 이후에 쓰인 것으로 아리우스이단에 속했던 사람이 정통 교회에 들어오려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그런 사람이 어떤 조건 하에서 교회의 성직(聖職)에 오를 수 있는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신학 사상
아타나시우스는 독창적인 신학자는 아니지만 신학사와 교회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비중은 대단히 크다.
성삼론
아리우스이단은 궁극적으로 신론과 연관된 성삼론의 문제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전통에 따라 하느님은 영원불변하고 전능하신 분, 어떤 물질적인 요소도 없는 단순하고 순수하신 분, 언제 어디에나 내재하시며 만물을 초월하신 분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하느님은 성삼(聖三)으로 되어 있는데 그 성삼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거룩하고 완전한 단 하나의 성삼 곧 성부 성자 성령 안에 계시는 하느님만이 존재하실 뿐이다. 성삼은 결코 그 어떤 외부적 요소를 지니지 않고 외부로부터 침해를 받지도 않는다. 성삼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합일체가 아니며 홀로 가장 완전한 창조능력이며 생산자이시다. 성삼은 본질상 상호 상통성을 지니며 나누일 수 없고 성삼의 효력은 다만 하나일 뿐이다”(세라피온에게 보낸 제1서간).
그러면 아타나시우스는 성삼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신다. 성자의 모든 것이 성부의 것인데 어떻게 이것을 알 수 있는가? 빛의 광체와 샘의 물줄기처럼 성자를 보는 것이 바로 성부를 보는 것이며 성자의 것이 곧 성부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성자는 늘 성부 안에 계시고 성부도 성자 안에 계신다. 광체 속의 태양과 말씀 안의 성령, 물줄기 안의 샘처럼 사실 성부의 것은 모두 성자의 것이다” (아리우스이단을 반박하는 변론 3,3). 아리우스는 성부께서 세상을 창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로고스(성자)를 창조하였다고 하는데 아타나시우스는 이러한 논리가 하느님께 대한 불경(不敬)이라고 비난한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머리카락, 참새들과 들풀 등 작은 것까지 염려하시는 분이신데, 세상 창조라는 막중한 일을 직접 하시지 않으시고 먼저 창조한 성자를 시켜 창조하게 한다는 것은 그분의 자비와 섭리에 모순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성자께서 성부와 ‘동일한 본성’(homousios) 즉 같은 천주성을 지니신 분이라는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을 강변한다. 또 성자께서 성부와 같은 본성은 아니지만 ‘비슷한’(ho-moios) 본성을 지니셨다고 하는 후기 반 아리우스이단의 주장도 배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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