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아타나시우스 주교는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4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고 사목자이다. 그는 불굴의 투지와 용기를 지닌 사람으로 온갖 반대와 어려움을 무릅쓰고 니체아 공의회의 신앙을 고수한 제일인자이다. 그래서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우스는 그를 ‘교회의 기둥’이라 일컬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주교직 이전 그는 295년경 알렉산드리아의 이교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304-311년) 보았던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으며, 젊은 나이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는 이교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318년 알렉산델 주교는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부제품을 주고 자기 비서로 일하게 하였다. 이 해는 아리우스가 주교회의에서 단죄를 받은 해였기 때문에,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이단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30세가 되던 325년에 그는 알렉산델 주교의 비서로서 니체아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며, 공의회에서 발언권은 없었지만 배후에서 알렉산델 주교를 보필하면서 괄목할 만한 활약을 하고, 유명한 주교신학자들과 사귀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후에 45년간의 주교직을 수행할 때에 큰 도움이 되었다. 3년 후인 328년 4월17일 알렉산델 주교는 노환으로 사망하면서, 33세의 젊은 그를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지명하였다.
주교서품 이후 아타나시우스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지명되자 멜레씨우스 이단자들이 크게 반발하였기 때문에 그의 주교 서품은 6월8일에야 이루어졌다. 한편 콘스탄띠누스 황제는 아타나시우스의 주교직을 인정하면서도, 귀양에서 풀려난 아리우스와 교류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신임 주교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것은 45년간의 그의 주교직 기간 동안 5차례에 걸쳐 17년간의 유배생활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아리우스 이단자들은 니체아 공의회에서 단죄를 받았지만 황제의 비호를 받으며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었고, 멜레씨우스 이단자들과 연합하여 아타나시우스 주교에 대해 온갖 모함과 방해 공작을 계속 하였다. 반대자들은 335년 띠로에 모여 지역회의를 갖고 아타나시우스를 해임시켰으며, 콘스탄띠누스 황제는 11월 7일에 그를 트리어로 유배 보냈다. 황제가 337년에 사망하자 아타나시우스는 그 해 11월23일에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오게 됨으로써 이 첫 번째 유배는 만 2년만에 끝났다.
그러나 니꼬데미아의 에우세비우스 주교를 주축으로 한 그의 적대자들은 339년에 안티오키아의 지역회의를 개최하여 아타나시우스를 다시 해임하고 까빠도키아 출신 그레고리우스라는 인물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할 수 없이 로마로 피신하였다. 율리우스 1세 교황은 341년에 로마 지역회의와, 343년에 사르디카 지역회의를 각각 열어 아타나시우스가 알렉산드리아의 유일한 정통 주교임을 선포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자기 대신 세워진 그레고리우스가 345년에 죽자 다음 해인 346년 10월 21일에 돌아옴으로써 두 번째 유배는 7년5개월만에 끝났다. 그 후 그는 356년까지 10년간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 많은 저술활동을 할 수 있는 황금기를 갖게 된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의 옹호자였던 콘스탄스 황제(콘스탄띠누스의 아들)가 350년에 서거하고, 뒤를 이어 아리우스파를 지원하는 콘스탄씨우스 황제가 즉위하자 상황은 급변하였다. 황제는 353년에 아르스에서, 355년에 밀라노에서 각각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아타나시우스를 파문하고 대신 까빠도키아의 조르지우스를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356년 2월 8일 이집트 수도자들에게 피신하게 되는 데, 세 번째 유배생활은 6년간 계속되었다.
이때 유배에서 풀려나게 된 경위는 특이하다. 361년에 즉위한 율리아누스 황제는 로마제국 안에 이교(異敎) 신앙을 재건하려 하였기 때문에, 흔히 그를 ‘배교자 율리아누스’(Julianus apostata)라고 부른다. 그는 종교문제로 유배당한 주교들을 풀어주었기 때문에 아타나시우스도 362년 2월 22일에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자 정통파들과 세미아리아니즘(반 아리오이단) 추종자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회의를 열어 교리상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일치점을 찾으려 하였는데,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원치 않던 율리아누스 황제는 아타나시우스를 ‘평화를 파괴하고, 신들의 원수’라는 죄목으로 362년 10월24일에 다시 추방하였다.
율리아누스는 363년 6월26일에 전사하고 발렌스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아타나시우스에게 내려진 추방령은 364년 2월에야 해제되었기 때문에 네 번째 유배는 1년 4개월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아리우스이단의 동조자였던 발렌스 황제는 365년 10월5일에 아타나시우스를 다시 귀양 보냈다.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이 황제의 명령에 불복하여 반기를 들자, 황제는 아타나시우스를 366년 2월 1일에 풀어주었기 때문에 다섯 번째 유배는 4개월만에 끝났다. 그 후 아타나시우스는 373년 5월 2일 78세의 고령으로 죽기까지 비교적 평온하게 지낼 수 있었다. 이처럼 아타나시우스의 생애는 교회의 정통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겪은 수난의 생애라 할 수 있다. 교회는 그의 사망일을 기념하여 그의 축일을 5월2일에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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