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색이 고와지는 가을이 되면 칠갑산의 아흔아홉 계곡은 용암이 흘러내리듯이 단풍으로 불타기 시작했다. 오후 3시만 되어도 계곡의 가을볕은 짙다 못해 거뭇해진다. 웅아리하는 계곡물을 따라 오르노라니, 오색 깃발을 휘두르며 무녀가 무가를 부르고 있었다. “삼신제왕님네! 아들 섬겨주시던 천수관담, 딸 섬겨주시던 문수관담, 제불제처 낙상관암 삼십삼천은 도솔천…” 무녀가 춤을 추는 단 아래에는 도시때깔 나는 두 아낙이 무릎을 꿇고 손을 비벼 소원을 빌고 있었다. 무녀의 옷과 오색 깃발이 단풍으로 가득 찬 산빛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일주일만 성당과 절간을 바꾸자고 하던 칠갑산 장곡사 주지 스님, “달 없는 밤에 징을 치지말고, 달빛 푸른 시월 밤에 징을 치소”라고 화두를 꺼내더니, 도(道)는 자연과 마음의 조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세상에는 도를 닦는다며 적삼벗고 은가락지 낀 놈이 많소. 벌거벗고 환도 차고 말 탄 놈은 광대지는 될 수 있어도 선악의 인(因)은 닦을 수 없소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최고로 갈망한다. 그러나 그 사랑의 조화 속에서도 고독을 느끼는 것이 사람이다. 사랑은 멈추지 않는 내면의 부조화 때문에 고뇌하고 좌절한다. 어찌 보면 인생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내면의 부조화를 진정시키려는 몸부림이다. 무녀가 춤을 추어도 수도승이 목탁을 쳐도 사제가 기도를 하여도 그 내면은 불꽃이 형형색색을 내는 칠갑산 단풍처럼 부조화를 이루며 타고 있다.
신앙인은 자신의 내면을 잠재움으로써 영적 진보를 이루기보다 자기 내면의 밑바닥인 심연에 타고 있는 부조화 불꽃을 겸손되이 인정함으로써 시작한다. 묵상기도와 감각의 단속은 얼마간 내적인 평화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휴화산에 불과하다. 창세기 4장의 카인의 이야기는 하느님께 대하여 인간은 내면적으로 부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언제 어떻게 하느님께 반역할지 모르는 악에 대한 인간의 잠재성 혹은 악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사제인 나는 자신의 내면에 대하여 정직하고 진실된 성찰과 인식에 이른 만큼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게 될 것이다. 사제인 내가 내면의 성찰이 부족하여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 무지하고도 고상한 교만이 나를 심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