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이 칠갑산 새벽바람이 소나무를 흔들어 지어내는 물소리를 들어보려무나” “아버지, 그 물소리를 내는 바람결에 밤새(夜鳥)가슴에 묻은 안개 마르겠죠” “아들아, 보이지 않는 손이 키우는 저 소나무를 좀 보려무나” “아버지, 허리를 굽은 것을 보니 나이가 많은가 봐요”
“너 당장 집에 안 들어 올 거야! 내일 모레면 중학교에 들어갈 녀석이 철없는 짓만 골라 할거야!” “아빠, 난 아빠가 무서워요. 아빠는 꼭 숨었다가 빨리 달리는 자동차를 잡는 교통순경 같아요. 내가 1학년 때 유리창을 깼었는데, 그때 나를 노려본 아빠의 눈은 꼭 뱀눈 같았어요. 아빠는 내가 잘못 할 때마다 그것을 수첩에 적어 놓으시죠? 난 아빠가 퇴근할 시간이 되면 두려워져요. 집에 돌아오시면 말씀 없이 나를 바라보시고 두고 보자는 것 같아서요. 호되게 매를 맞을 날이 내일일지 모레일지 몰라서 불안해요”
나와 더불어 칠갑산을 오르는 그 아버지는 인자하고 멋스러웠다. 산을 보면 시심(詩心)을 일으켰고, 계곡에 앉으면 노래하자 하였다. 가을날 석양을 안고 풀밭을 걷는 신비의 즐거움도 누릴 줄 아는 이였다. 나는 곧잘 그에게 “당신은 죽으면 뼈가 푸른빛을 낼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지난 가을, 볕자락이 짙어진 오후에 성당 후원에 앉아 가을만 되면 고독의 병이 도진다고 사춘기 소년 같이 말하는 이였다.
그러나 아내와 두 아들이 있는 집안 사정은 사뭇 달랐다. 산과 계곡에서는 시인이요 풍류랑이었지만, 집안에서는 거친 폭군이며 뱀눈을 가진 감시자이고 공포의 침묵으로 가족들을 질식시키는 사람이었다. 아내에게는 보이면 밉고 안보이면 허전한 남편이었다. 둘째 아들에게는 시인의 아버지였고 맏아들에게는 공포의 아버지셨다.
그는 어느 날 나를 찾아와 자신에게 극단적인 양면성이 있노라고 말하였다. 마치 하느님은 한편으로는 시인이요 멋장이시요 따뜻한 분이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 죽으면 보자’는 식의 가혹하고 무자비한 심판자 또는 사람이 고통을 겪을 때는 침묵을 지키시다가 사람이 세상을 좀 즐기려면 숨었다가 뱀눈을 뜨고 적발하는 교통경찰관 같은 분으로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하느님께 대한 이중감정은 마치 신앙유산처럼 아니 원죄처럼 모든 이에게 전수된다. 신비와 자비의 하느님, 현실과 심판의 하느님 때문에 오늘도 고해소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성당이나 신부만 보면 오던 길도 돌아가는 이가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나를 자유롭게 선택하시듯이 나도 하느님께 대한 나의 감정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