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무서워하는 마녀의 성이 있었다. 사실 마녀의 모습을 제대로 본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서 마녀는 더 두려운 존재였다. 어느 날 마녀의 실체를 알고 싶은 왕이 마녀의 성에 들어가는 사람에게 상을 준다는 공고를 낸다. 나라 안팎에서 모여든 왕자들과 용사들은 총과 칼, 대포와 불화살 등 온갖 무기를 가지고 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마녀는 이들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다.
그런데 이 싸움을 유심히 지켜보던 한 사내가 “마녀의 성에 들어가는 법을 이제 알겠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버린 뒤, 성문을 예의 바르게 두드리면서 “들어가도 될까요?” 하고 묻는다. 그러자 그 어떤 강력한 무기로도 열 수 없었던 성문이 열리고, 수줍고 앳된 마녀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2018년, 한반도에 불기 시작한 거센 변화의 바람은 우리에게 새로운 평화의 길을 보여주는 문을 열고 있다. 올해 들어서만 벌써 세 번째로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났고, 두 번째 북미 정상회담도 연내에 열릴 가능성이 점쳐진다.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 사이에 사실상의 ‘불가침 선언’이 이뤄졌고, 일본 아베 총리 앞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편지를 자랑하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을 보면, 주한미군 가족 철수가 검토됐던 지난 전쟁위기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이미 어떤 사람들에게는 ‘소탈하고 귀여운’ 북한의 지도자가 곧 남한을 방문할 것이고, 그는 싱가포르보다도 더 먼 나라를 향해 날아갈 준비가 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금까지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평화의 길은 그렇게 순탄하지 않을 수 있다. 대화와 협상을 통한 평화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상대를 믿을 수 있어야 하는데, 남과 북은 아직 서로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 평화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의 얘기처럼, 갈등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당사자들 모두가 변해야 하지만, 그동안의 남북관계 안에서는 ‘우리의 변화’를 생각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전쟁 중인 한반도의 군사적 대치 속에서,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남한도 변해야 한다는 얘기는 쉽게 이적행위라는 색깔로 칠해졌다. 한반도 문제의 당사국인 미국에서도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서는 북한만 변하면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정치인들, 관료들뿐 아니라 ‘선량한 보통 사람들’에게도 북한은 여전히 용인할 수 없는 정권이 통치하는 ‘은둔의 왕국’(hermit kingdom)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이어진 적대적인 냉전 그리고 분단 구조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상대를 ‘마녀’가 아닌 사람으로 대했다가는 기만과 요술에 걸려들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핵이 없는 한반도에서 진정한 평화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들’ 역시 ‘우리’ 같은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남에게 바라는 그대로 해주라’는 예수님의 황금률,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은 적대적인 분단의 구조를 깨뜨리는 데 꼭 필요한 덕목이다. 총이나 칼 대신에 장미와 예의를 가지고 상대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는 평화의 중재자, 우리 교회가 두려움이 남아 있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할 수 있는 평화의 중재자 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