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0일: 나의 마지막 인도 여행지인 캘커타로 가는 기차시간은 오후 4시였다. 서둘러 릭샤(인도의 교통수단)를 잡아타고 역으로 향했다.
2월11일: 근처의 마이단 공원을 거쳐 구세군여관 바로 옆에 있는, 동양에서도 크기로 손꼽히는 인도 박물관에 가보았다. 이곳에는 카주라호에서 출토된 ‘연애편지 쓰는 여인’ 등의 돌조각도 있고 동식물과 지질학에 관계되는 자료도 많았다. 2층엔 부족민의 생활도구나 의류 장신구들이 있었는데 그냥 눈으로 보고 지나치는 데만 3시간이 걸렸다.
내친김에 좀 떨어진 빅토리아 기념관까지 발길을 옮겼다. 기념관 앞 호수에는 대리석의 반짝이는 빛이 그대로 출렁이는 듯 했고 노을은 빅토리아 기념관 왼쪽에 우뚝 솟은 성바오로성당의 십자가에 걸려 앉아있었다.
2월13일: 오늘은 칼리가트와 그 옆에 있다는 마더 데레사의 집에 가볼 작정이었다. 스스로 찾아내려고 밖으로 나왔지만 막막했다.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중년 신사를 붙잡고 물으니 건너가서 버스를 타야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어렵게 정류장은 찾았지만 내가 또 무슨 수로 가트행 버스를 알아본단 말인가. 쭈뼛거리다가 한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자기도 그쪽 방면이니까 같이 타면 된다는 것이었다.
칼리카트, 힌두교의 칼리여신을 모신 성지이다. 각 지에서 온 참배객들로 혼잡하고 칼리여신에게 바치기 위해 한쪽에서는 산양들의 머리가 잘려진 채 죽어나가고 있었다.
입구에는 거지떼들만 가득하고 산양들이 흘린 피로 범벅이 된 마당에는 피비린내가 자욱했다. 이런 혼잡한 곳에서 신은 잘 견디어 나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한 치의 의심 없이 신에 의지하려는 모습이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칼리카트에서 왼쪽으로 돌면 바로 나오는 마데 데레사의 집에는 전 세계에서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길게 1년 이상까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를 해주고 있었다.
마데 데레사는 이제는 너무도 늙어버려 일도 많이 할 수가 없고 사진 촬영도 금지되어 있었지만 누가 그 얼굴을 밉다고 할 것인가. 살아있는 성녀라고 불리는 마더 데레사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나는 여정이 짧은 관계로 봉사는 할 수 없어 아쉬웠지만 1주일 봉사하려면 아예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한 봉사자의 말이 뜨끔하게 여겨졌다. 물론 진실하게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깟 1주일 봉사한 것으로 천사가 된 듯 봉사의 흔적만을 남겨가려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다.
칼리가트를 등지고 돌아오면서 나를 생각했다. 나도 봉사의 흔적을 남겨가려는 사람 중에 하나는 아니었는지…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을 이용해 나를 돋보이게 하려는 건 아니었는지…부끄러운 마음만 가득했다.
2월14일: 오늘은 일요일. 미사에 참례하려고 숙소를 나섰다. 필리핀에서 미사참례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불교국이나 힌두교국을 여행한 탓에 거의 한 달이 넘게 성당 구경도 못했었는데 인도의 캘커타에서 빅토리아 기념관 옆에 있는 성바오로성당을 발견해 미사시간까지 확인해 두었었다.
성바오로성당은 밖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경건하고 웅장하기까지 했다. 미사의 방식도 특이해서 꼭 로마교황청에서 미사를 드리는 기분이었다.
미사보를 쓰지도 않았으며, 영성체도 일렬로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제대위로 올라와 횡렬로 무릎을 꿇고 앉으면 두 명의 사제들이 차례로 처음엔 성체를 직접 입에 넣어주고 다음엔 포도주를 입술에다 적셔주는 것이었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은 평안하고 가벼웠다. <계속>
[구미리내의 인도이야기/유구한 대지 인디아를 가다] 11 사르나트에서 캘커타까지
마더 데레사의 집 전 세계 봉사자 몰려
캘커타 성당에서 미사참례 “인상적”
발행일1993-08-15 [제1867호, 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