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3월5일은 스물네 살의 꿈 많은 청년이던 암릿(네팔인)씨에겐 악몽과도 같은 날이었다. 이날 이후 그의 인생은 상상치도 못한 좌절과 방황 속을 헤매야만 했다.
암릿씨는 네팔 현지로부터 3명의 브로커에게 2천5백달러를 주고 91년 12월12일 입국했다. 며칠 뒤 ㅎ섬유(경기도 의정부)에 취업한 그는 지난3월5일 ‘롤링 머신’ 조작 도중 오른쪽 손목이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그땐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다른 부위도 아니고 오른손을 못 쓰게 됐으니 사람구실은 이제 못한다는 절망감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어요”
네팔 트리부번대학 경영학도였던 그가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코리안 드림’을 안고 찾아온 한국은 그에게 불구라는 좌절감만 안겨줄 뿐이었다.
입원기간 중 네팔 동료들이 찾아왔을 땐 잠시나마 그 고통을 잊었다가도 혼자 운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은 회사 측의 태도. “사고가 난 이후로 사장을 한 번도 못 만났습니다. 부장이라는 사람은 본인의 과실이라며 보상을 해줄 수 없다고 했고, 회사 전무를 찾아가서도 ‘기다려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결국 그는 체류시한인 6월29일을 며칠 앞두고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를 찾아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비자기간을 넘겼으니 그도 소위 불법체류자인 셈이다.
그는 또 의사소통이 될 때까지 직접 구타는 아니더라도 가혹행위나 욕설을 당한 적도 많았다고 말했다. 함께 일하던 필리핀인(7명) 네팔인(4명)들도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회사를 옮겨 모두 흩어졌다. 돌아간 이중에는 암릿씨처럼 손목이 잘린 사람도 있었다.
“한국이 경제적으로는 큰 발전을 했지만 기업주들의 의식은 그에 못 미친다는 생각입니다” 그는 또 “우리가 도둑질이나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받는 것인데 최소한의 인격적인 대우는 해줘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한국 정부가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줄 것을 요청했다.
“고국을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절대 본국을 떠나지 말라는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하루빨리 보상문제가 해결돼 귀국하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까지 없애지는 못한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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