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해지면 육체노동을 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그날도 성당 후원 나무에 거름을 주고 부토까지 끝내고 사제관으로 막 들어가려는 참이었다. “저기, 말씀 좀 묻건는디유. 혹시 신분님 되시나유”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말을 걸었다. “지금은 안댕기지만 저두 국민핵교때 한 삼년 신자질을 해봤구만유. 그때 있는 향나무가 여태 있내유. 이 숭당 자리가 왜정시대때 ‘청양관’이라고 유명한 여관이었대유. 숭당 뒤는 그때 유명한 술집였대유. 시방으로 치면 룸싸롱인 셈인지유” 그 ‘룸싸롱’은 사제관도 되었고 수녀원도 되었다. 지금은 그 자리가 성당 후원이 되어 있다.
왕년에 신자질을 해봤다는 그 남자의 과거도 성당터 만큼이나 파란만장하였다. “지가 철이 들면서 절이 좋아 보이드라구요. 그래서 칠갑산 장곡사엘 자주 댕겼쥬. 그리고 고등핵굘 졸업하고 입산을 하지 않았것유. 근디 처음에 좋아 보이던 절이 머리 깎구나니 왜 그리 싫어지는디 미치겠드라구유. 그래서 다 때러치구 나와서 중국집 철가방 좀 들었지유. 갑자기 늑막염이 걸려 기도원엘 가면 났는다길래 한 슥달 기도원 국수도 먹어봤유. 병이 도져 일년 내 죽다 살아났구만유. 그 디루 노가대다 잡역이다 돈 생기는 일이면 닥치는 대루 했지유. 신분님은 아실랑가 모르것는디 몸굴려 먹고 사는 놈들은 일하면서 별별 잡소리를 다 한다니깨유. 저두 숭당이다 절이다 중국집이다 기도원이다 안댕겨본디 읍으니 설교다 설법이다 흉내는 잘 내지유”
그는 선사(禪師)에 졸탁 동시라는 구절(句節)을 들고 나와 나에게 설법을 하였다. 내용인즉 어미 새가 삼칠일, 그러니까 알을 품은 지 스무하루가 지나면 알에서 새끼 새가 나오는데 그때 새끼 새가 알 안에서 톡톡 알을 껍질을 조은다. 이것이 ‘졸’(拙)이고 새끼 새가 안에서 쪼는 소리를 듣고 동시에 어미 새가 밖에서 이 소리를 듣고 탁탁 알껍질을 쫀다. 이것이 탁(琢)이다. 이렇게 ‘졸’과 ‘탁’이 동시에 어우러질 때 새끼 새가 탄생하지만 이 졸과 탁의 타이밍이 일치하지 않으면 모처럼의 새끼 새는 빛도 못보고 죽고 만다.
그날 밤 나는 잠이 오질 않았다. 도대체 이십여 년 전에 신자질을 했다는 그 사람은 왜 다시 교회에 나타났으며, 나는 왜 그의 설법을 듣고 괴로워해야 하는가? 나를 뒤덮고 있는 껍질들! 적어도 나는 회칠한 무덤이 아니라는 강한 부정 때문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