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본원에 가는 통일호를 타는데 우연치 않게 은퇴주교님과 동행하게 되었다. 시내에서는 토큰이면 되고, 시외는 제일 싼 기차를 타신다는 주교님의 철칙을 따르는 데는 이해와 믿음이 필요했다. 왜냐면 이 기차를 타러 오기까지 난 몇 번이나 버스 안에서 밀리는 노선을 보면서 기차를 놓칠까 염려한데 비해 주교님은 쉼 없이 묵주알을 돌리셨고, 버스를 갈아탈 때, 좌석버스나 택시를 권유한 나의 제안에 침묵으로 토큰 두 개를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한 동행으로 기차를 타게 되자. “우리 이제부터 대침묵 지키자”라고 하신다. “아니, 주교님 지금 이 시간은 수녀원에서도 대침묵 시간이 아닌데요…”라는 나의 응답에 “지구 저편 프랑스에는 지금 밤이니까 대침묵 시간이란 말이여”라고 하신다. 왜 하필이면 프랑스일까. 가까운 일본을 예로 드시지 않고.
그때부터 시작된 대침묵! 번잡한 기차 속에 노주교와 젊은 수녀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은 남들에게 꽤나 흥미 있는 주목이 된다는 주교님의 판단에 따라 조용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주목시키지 않으려고 하면서 짙은 녹음이 깔린 차창만 바라본다. 한참 가다가, 조용히 속삭이시는 말씀, “나중에 내 오징어 한 마리 사줄 것이여” “아니 오징어는 왜요, 주교님 좋아하세요?”라는 나의 반응에 “아니, 난 못 씹어 그렇지만 언제 다시 이러랴, 수녀와 내가 함께 기차를 타는 것이…” 언제 다시 이러랴. 그렇지 정말 언제 다시 이러랴. 주교님께서는 82년 만에 처음 있는 나와의 동행이니 언제 다시 이러랴는 정말로 맞는 말씀이다. 언제 다시 이러랴? 지금 이순간은 영원히 이순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똑같은 날 똑같은 순간은 없는 것이다. 비록 사람과 만남의 차원에서 같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생각 말 마음은 다르기에 똑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만남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사람과의 만남이라도 그 만남의 성질, 내용, 양상은 다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모든 것은 유일성을 띄며 두 번 다시 반복되어 질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다.
언제 다시 이러랴? 다시는 똑같이 이러지 못할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지나고 나면 만족하든지, 후회하든지 한 순간이고 이런 우리의 삶이라면 이 순간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어진 순간 안에서 만나는 사람과 해야 할 일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한마음으로 만나는 사람에게 길든 짧든 시간의 구애됨 없이 이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대하는 것이다. 그럴 때 마음이 순수해지면서 아쉬움을 갖게 된다. 어떤 상황이라도 미움이 생기지 않으면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이 순간을 새기고 싶어 할 것이다. 적어도 이 정도만 의식한다면 영원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순간순간의 삶이 메마르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