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하우스가 즐비하게 들어선 도심의 외곽지대를 지나노라면 매일매일 싱싱한 야채를 먹게 해주는 감사로움을 갖는다. 그러나 비닐하우스에 있는 싱싱하고 굵직한 야채들처럼 오늘의 젊은이들은 보기는 싱싱하고 듬직한 모습들인데 연약하기 짝이 없기에 쉽게 좌절하고 포기한다. 끈기와 인내의 발휘를 위해서 스스로 갖는 각오보다 마치 바람을 막고 인공열을 가해주는 비닐하우스같이 끊임없이 누군가가 떠받쳐 주기를 원한다.
요즘 젊은이들에게서 광활한 대지에 버티고 서 있는 느티나무 같은 기개를 찾아볼 수 없고, 들판에서 무서운 구둣발에 밟혀도 살아남는 민들레 같은 끈질김을 보기가 힘들다. 그래서일까?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연약하고 가냘픔으로 안쓰러움이 들 때가 많은 것은-. 좀 열심히 살아보고자 본당 활동이나 모임에 참가한다 해도 돌아서면 비신자과 다를 바 없다고 하는 것은 그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유기도를 시켜보면 길고 대단한 준비가 있어야만 되는 것이기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산다는 것도 거짓말이 아니리라.
“하느님을 좀 만납시다.” 이 말은 내 안에서, 그리고 이웃 안에서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또 자연과 성서, 사건을 통해서 많은 것을 말씀하시는 하느님 그 하느님을 좀 만나고 하느님과 인격적 만남을 갖고 삽시다는 말이다. 하느님을 만나는데 나의 삶과 내 안에서 만나야지, 남의 삶과 다른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만 만나지 맙시다는 것이다.
‘나’라는 이 소중한 보물 안에 하느님은 함께 계시며, 나와 함께 하느님은 당신의 이야기를 나누시고자 원하시기에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얘야, 너 이야기 좀 해볼래, 그리고 내 이야기도 좀 들어보렴.” 이런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을 가질 때 우리의 젊은이들은 시냇가 뙤약볕 아래 있는 수양버들가지 마냥 축 늘어진 어깨로 삶의 무거움에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하지 않을 것이다.
바쁜 하루 속에서 무력함을 느낄 때라도 하느님께 대한 희망으로 꿋꿋하게 일어서는 용기를 가질 것이며, 가난함 속에도 비굴해 지거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영혼의 풍요로움을 지니고 웃음을 잃지 않으리라. 초췌하게 야윈 몸일지라도 어느 누구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대담함으로 가치 있는 길을 추구하며, 스스로의 결단에 책임을 질 줄 아는 믿음직스럽고 든든한 우리의 희망이 되어주고 꿈나무가 되어줄 수 있으리라.
무거운 책가방이나 일속에 파묻혀 가는 젊은이들이여, 이 시대에서 그대들이 만나고자 찾아 나설 것은 전자오락 게임이나 혼란한 TV 영화가 아니라 바로 그대들 안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임을 잊지 말고 그 기다리시는 “하느님을 좀 만납시다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