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친구 두 사람이 같은 곳으로 함께 낚시를 갔다.
그런대로 낚시도 잘되고 재미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한 친구는 낚시를 해서 큰 물고기는 다시 저수지로 놓아주고 작은 고기만 챙겨서 집어넣었다. 하도 이상해서 다른 친구가 그 친구에서 “자네는 작은 고기를 놓아주고 큰 고기를 가져가야 하는데 그 반대로 작은 고기만 챙겨 넣는 이유가 뭔가?”하고 물었다.
그 친구 대답이 “우리 집에는 프라이팬이 10인치짜리밖에 없어서”하더란다.
사목일선에서 상담이나 소문을 통해 접하게 되는 문제 중의 하나가 자기가 소속된 본당의 사목자나 수도자, 대부모와의 불편한 관계로 인해 다른 본당의 문턱을 기웃거리는 사람과의 만남이다.
당사자의 충격(?)이나 섭섭함을 모르는바 아니다. 본인의 아픔이나 서운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사정이 어떠하고 사연이 어찌되었던 간에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심지어는 그러한 문제들로 인해 교회를 등지는 사람들도 있다는 점이다. 마치 어린아이를 씻기고 난 다음 구정물만 버려야 하는데 구정물을 쏟아버리면서 어린아이까지 함께 버리는 격이다.
물론 그러한 원인제공을 한 사람의 책임도 크며, 나 자신부터가 그러한 악표양의 제공자가 될 수 있음을 솔직히 인정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담자를 만나게 되면 무겁고 착잡한 감정을 떨칠 수 없다.
종종 우리는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얼마나 가치 있게 살고 있는지 보다는 그가 얼마나 재산을 가지고 있는지를 더 중시한다. 그가 무엇을 해내었는지는 세상의 최종적 평가기준이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하느님의 최종적 평가기준이다.
‘하느님은 사람을 평가하실 때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만져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