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의 나라 네팔을 돌아낸 여행의 마지막 기착지인 인도에 도착한 것은 1993년 1월16일 오후5시였다. 네팔 이민국에서 출국 도장을 받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인도 이민국에서 입국 도장을 받는 것으로 국경통과는 싱겁게 끝이 났다.
오늘 밤은 소나울리에서 머물기로 하고 국경 근처에 숙소를 정했다. 같은 숙소 안에 머물고 있는 독일친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는데 소나울리에는 좀처럼 식당이란 것이 안보였다. 우리는 고민하다가 국경을 넘어가기로(?)했다. 잠은 인도에서 자고 밥은 네팔에서 먹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1월 17일 독일 친구들과 숙소를 나와 고락풀행 버스를 찾아냈는데 이 버스는 버스의 형상이 아니었다. 다 뜯어져 솜이 너저분한 의자들, 깨어져 금이 갈대로 다간 유리창…어떻게 굴러가는지 의문이었다.
고락풀까지는 3시간이었지만 목적지인 델리까지는 그곳에서 다시 기차를 타야했다. 독일 친구들에게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하고 기차역으로 나가니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외국인은 나 혼자였다. 인도인들이 빤히 쳐다보는 게 벌써부터 무서웠다.
기차는 예정인 5시35분보다 1시간 10분이나 늦은 6시45분에 출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철이 30초만 더 정차를 해도 죄송하다는 안내방송을 하는데 여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어기고도 어떤 사죄의 말도 없었다.
델리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갈 길이 바쁜데도 기차는 세월아 네월아였다. 얼마나 천천히 가는지 무임승차를 하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타고 내릴 정도였다.
우리나라 같으면 부산과 서울을 수십 번씩 왔다 갔다 했을 시간-장장 20시간 만에 뉴델리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의 부산한 움직임…아, 여기는 인도.
1월18일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플랫폼을 빠져 나오고 있는데 저기 한 외국 배낭족이 앞서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리둥절, 많은 사람들에게 질려 있었는데 잘됐다 싶어 달려가서 말을 걸었다. 인도에 벌써 세 번째라는 그는 이름은 마이클, 뉴질랜드 사람이었다.
든든한 마음으로 메인 바르지 구경에 나섰다. 양쪽에 상점이 늘어선 좁은 길로 릭샤, 자가용들이 앞 다투어 지나가고 사람들의 호객하는 소리에 소들이 유유히 걸어 다니는 모습. 이제 인도가 조금씩 느껴지고 있었다.
1월19일 마이클과 함께 자마미스지드(이슬람교 사원)로 향했다. 그곳은 입장료가 따로 없지만 카메라를 가지고 들어가는데 5루삐였다. 또한 경내는 이슬람교 예배가 거행되는 성역이라 신발을 입구에 맡기고 들어가야 했는데 나올때 문지기가 신발보관비로 얼마간을 받고 있었다.
맨발로 사원 앞에 들어서니 궁전을 앞에 두고 인도사람들이 경배를 올리기에 바빴다. 삶에 찌들어 허덕이지만 그것을 원망하지 않고 신에 의지하며 살려는 그들의 진지한 모습이 오히려 아름다웠다.
나는 그들의 모습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과연 저들처럼 열성적으로 미사를 드린 적이 있었는가하는 생각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1월20일 아침 일찍 비자문제로 외국인 등록소에 들렀다가 오후, 인도의 아버지인 간디의 묘, 라지가트로 향했다. 한참을 가서야 발견한 이 라지가트는 비폭력에 의한 저항을 역설하며 인도 독립운동을 이끈 마하트마 간디가 화장된 곳이다.
<계속>
[구미리내의 인도이야기/유구한 대지 인디아를 가다] 6 소나울리에서 뉴델리까지
신께 귀의하는 인도인들 모습 감동적
간디의 시신 화장했던 라지가트 참배
발행일1993-06-06 [제1858호, 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