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자에게 있어 가장 큰 어려움 중의 하나는 극적인 시련으로 낙담이나 좌절 중에 하느님을 거슬러서 항거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두서없이 나열한 후 으레 이렇게 푸념한다.
“이래도 하느님이 인자하단 말입니까?” “그래도 하느님은 존재한단 말이오?”
이들에게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아픔을 함께 나누며 위로하고 도와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목자에게 큰 고충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그리스도교는 급속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많은 취약점을 안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확고한 신관(신관), 하느님관이 수립되어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올바른 고난, 고통관이 정립되어 있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수천년 동안 민족신앙으로 이어져 내려온 유교, 불교와 무속신앙에 비해 그리스도교의 자발적 수용은 이제 불과 2백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의 정신적 토양에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의 심성에 알게 모르게 현세주의, 인과응보사상 그리고 기복사상 등이 짙게 배어 있고 또 끊임없이 침투하고 있다.
일선 사목 경험 중에 느끼는 것은 영세 입교전만 해도 자기 탓이나 조상 탓으로 돌리던 것을 영세만 받으면 잘못된 일은 모두 하느님 탓으로 책임 전가시킨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배후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찾으려고 한다. 특히 고통이나 재앙처럼 나쁜 일일수록 더욱더 철저하게 하느님의 흔적, 하느님의 지문을 채취하려고 별의별 상상력을 다 동원하여 신경을 쓰고 자기학대를 일삼고 있다.
사제가 되고나서 가끔씩 듣게 되는 ‘신부가 된 동기’를 물어오면 ‘당신의 잘못된 일에 하느님의 혐의사실이 없음을 밝혀드리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곤 한다.
억울하신 하느님의 누명을 풀어드리면서 덧붙이는 말은 이렇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이상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