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0일. 방글라데시 다카를 떠난 지 2시간여 만에 네팔에 도착했는데 비행기 안에서 바라보니 여기 저기 펼쳐져 있는 설산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공항에서 만난 프랑스 배낭족들과 동행해 어렵지 않게 두르바 광장 근처에 숙소를 구할수 있었다. 짐을 풀자마자 나선 곳은 네팔의 상징인 살아있는 여신, 쿠마리의 집이었다.
초경이 생기기 전의 어린 소녀를 여신으로 앉히고 살아있는 신의 대접을 한다는 네팔 사람들, 하지만 그렇게 떠받들며 신으로 받들다가도 그 여신이 여자로서의 생리가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보통사람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자네들끼리 신을 만들고 신을 내치고 할 수 있는 네팔의 풍습이 우습기도 했지만 한번 자기네들의 신이 생기기만 하면 그가 신의 자리에 있는 한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섬기는 네팔인들의 심성이 한편으로는 경건하기도 했다.
카트만두 시내를 한참 구경하고 나니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두르바 광장에 자리잡고 앉아 분주히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집생각이 밀려왔다.
겨우 진정을 시키고 잠이 들었는데 추위가 가슴속까지 밀려드는 바람에 다시 깨어나고 말았다. 스웨터도 입고 이불도 두 개나 덥고 잤는데 발이 시려워 못 견딜 정도였다.
나는 얼마만큼의 모험을 더 해야 문명의 이기를 버릴수 있을까. 추위를 이불삼아 포근히 잠들수 있는 그날은 언제일는지.
1월12일. 오늘은 카투만두의 명소인 파스파트니스와 화장터엘 갔다. 거리가 멀어서 오토릭샤나 자전거릭샤를 타야 했는데 자전거릭샤꾼이 70루피를 달라는 것이었다. 눈치코치 하나로 네팔까지 굴러들어온 내가 아니던가! 나는 당당히 그의 전반값인 35루피에 파스파트니스로 향했다.
릭샤를 타고도 한참만에야 도착한 파스파트니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곳이었다. 강렬히 와닿은 인상들, 결코 부끄럽지 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 위치한 화장터에서는 죽은 사람들이 여럿이 태워지고 있었다. 맞은편 층계에 앉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뜻 모를 느낌이 가슴을 세차게 뚫고 스며 들어왔다.
화장터 바로 밑의 강가에서는 아낙들이 아무렇지 않은 듯 빨래를 하고 아이들이 즐겁게 뛰어 놀고 있었다. 단순히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아니었지만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걸려지고 있었다.
내일은 네팔 제2의 도시인 포카라로 떠나는 날이라 오늘이 카트만두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는데 한없이 처량하게만 깊어갔다.
발이 없는 여인이 구걸하고 있는 모습, 몸이 이상하게 꼬인 채로 북을 치며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모습, 때로는 역겨워 고개를 돌리고 외면한 적이 있었다.
아이들이 쫓아오며 돈을 달라고 외칠 때 소리를 지르며 떼어 버린 적이 많았다. 가난한 상인들이 하나라도 더 팔아 주길 원하는 눈빛으로 바라볼 때 짜증이 날 때도 있었다.
왜 그랬을까? 초라한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잊었던 것일까? ‘이런 모습은 아니겠지. 설마 이런 모습은 아닐테지’하는 내 마음속의 자만에서 행여 주님을 버렸던 건 아니었을까?
[구미리내의 인도이야기/유구한 대지 인디아를 가다] 4 다카에서 카트만두까지
신을 만들고 내치는 진기한 풍습 지닌 곳
화장터 아래 펼쳐진 풍경은 한 폭의 그림
발행일1993-05-09 [제1854호, 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