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 사제인사 이동이 있을 때마다 특히 본당 신부의 인사이동이 있을 때마다 떠나는 본당 신부의 이임사를 유심히 듣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본당에 있으면서 느낀 것은 정들었던 본당을 떠나면서 말 한마디를 제대로 잇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던 신부님을 뵌 적이 있은 후 사제는 교우들 앞에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한 적이 있다. 또 어떤 본당에 있을 때는 참으로 안쓰러운 교우의 장례미사 때에 집전신부님의 오열 때문에 미사가 몇 번이고 중단되는 것을 보고 그러한 결심은 더욱 굳어져 갔다.
사제란 따뜻하면서도 매정한 존재이어야 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운 결단을 하지만, 사제라고 해서 왜 피도 눈물도 없으리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사제(老司祭)를 모시고 그분의 본당사목을 보필해 드리다가 막상 떠나는 날 아침의 일이었다. 그분은 내 방에 들어오셔서 나를 부둥켜안고 울기만 하시는 것이 아닌가. “자네는 내 인생의 좋은 친구였네…. 나는 자네를 잊지 못할 것이네…” 내 가슴에 내 손끝에 닿는 것은 그분의 가녀린 흐느낌과 가냘픈 뼈마디밖에 없었다.
인간의 정은 무엇이고, 사제의 정은 무엇인가. 새 임지에 도착할 때까지 좀 더 잘해드리지 못한 무거운 자책감과 회한의 눈물을 삼키며 마음을 가누느라 무심하게 흘러가는 한 강물이 야속하게만 느껴졌었다.
친구도 여러 부류의 친구가 있다. 내 친구로서 그 이름을 말하기를 자신의 명예처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내 친구로서 남에게 말하기를 꺼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같은 연배의 친구이면서도 세대 차이를 느끼는 친구가 있고, 수십 년의 연령차이가 있어도 동년배 같이 느껴지는 친구도 있을 것이다.
‘나무는 조용하기를 원해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효도를 하려고 원해도 부모는 기다리지 않는다’는 말처럼 내가 본당 신부를 잘 모시려고 깨달았을 때 그 본당 신부는 이미 내 곁에 계시지 않는다. 함께 웃던 친구는 잊어도, 함께 울던 친구는 잊지 못한다고 하듯이….
함께 울던 나의 친구(?)여, 늙으신 나의 친구여, 부디 건강하소서. 오래오래 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