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9시경. 화려한 홍콩의 야경에 잠시 넋이 나간사이, 비행기는 어느새 카이탁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지난여름에 여권을 잃어버려 곤욕을 치렀던 곳이 바로 홍콩이 아니었던가. 감회가 깊었다. 두 번째의 방문이라 그런지 능숙한(?) 솜씨로 입국심사를 마치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당당히 AI이라는 버스를 타고 여행자들의 숙소인 청킹맨션을 향했다. 그곳이 가까워질수록 낯익은 거리들이 나를 반겼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어린 남자아이가 자기네 숙소가 도미토리 45달러라며 열심히 호객행위를 했다.
밤 10시가 가까운 시간이라 일단은 하루 머물러 보기로 하고 짐을 풀었다. 주인이 숙박계에 이름을 적는데 내 이름이 어렵다고 투덜댄다.
‘한글이름이라 그런가? 얼마나 예쁘고 자랑스러운 이름인데’
12월9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지난여름 홍콩에서 여권을 잃어버렸을 때 자기 일처럼 걱정해주고 도와주었던 친구 호크를 만나려고 찾아갔다. 그런데 그는 이미 다른나라로 취업을 가고 없었다.
12월22일 오늘은 홍콩의 경제도시인 중환에 가려고 시내로 나섰다. 그런데 이상한 건 사람들이 신호등을 안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신호등을 안 지켜도 차들은 신호등을 지키는 나라 홍콩. 사람위로 차들이 날아다니는 우리나라에 비해 사람이 먼저라는 사고방식이 더욱 더 샘이나게 했다.
12월24일 크리스마스 이브날 가보았던 마카오. 홍콩의 화려함에 가려 이제는 점점 늙어만 가는 도시라는 느낌이 확연했지만 아직도 여기저기 남아있는 유적들이 묘하게 나를 이끌었다.
두번째 큰 화재를 입어 앞 벽면만 남았는데도 오히려 더 유명해진 성바오로 천주당 터를 보고 나서 김대건 신부님의 동상이 세워졌다는 카모에스 공원으로 갔다. 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님 동상이라 매우 클 것이라고만 생각했기에 그 동상을 얼마를 찾아 헤매었는지 모른다. 마침내 찾아낸 김대건 신부의 동상은 공원 구석에 외로이 서 계셨을 뿐이었다. 아, 이런 실망이 또 어디 있었을까
나는 잠시 김대건 신부 동상 앞에서 묵상을 하고 성호를 그었다.
“주님 김대건 신부님이 너무 불쌍하십니다. 자랑스런 한국의 첫 사제이신데 이렇게 머나먼 타국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서 계시는 모습이 말입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은 용감하신 분이었습니다. 열아홉 살 어린 나이에 죄 많은 양들을 구원하시고자 일찍이 신부님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왜이리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할까요, 왜이리 마음 한 구석이 무거울까요”
얼마쯤을 묵상하며 깊은 상념에 잠겼었는지 카모에스 공원엔 어느새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내일이 성탄절인데 늦었지만 고국에 계신 부모님께 카드라도 보내드려야겠다. 이 어린 딸을 이역만리 타국에 보내놓고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계실까.
마카오의 밤은 이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계속>
[구미리내의 인도이야기/유구한 대지 인디아를 가다] 2 홍콩서 마카오까지
김대건 신부 동상서 기도드려
발행일1993-04-18 [제1851호, 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