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펜하겐에서 스톡홀름으로 가는 밤차를 예약하려고 매표구로 향했다. 그러나 여행철 여행 시즌이라 좌석이 모두 차고 없다는 것이다. 이를 어쩐다지? 물가가 비싼 코펜하겐에서 하룻밤을 그냥 묵을 정도로 내 여행 경비가 넉넉하지 않을 뿐더러 스톡홀름으로 가려던 내 계획이 엉망이 되었으니 말이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머리를 돌려서 노르웨이 오슬로로 가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배낭족 주제에 3천 원 가량의 예약비가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정작 기차를 타고 보니 예약을 하지 않았더라면 쫓겨날 판국이었다. 빈자리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그나마 예약도 안한 배낭족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내가 탄 2등칸에는 모두 히피족 같은 친구들만 있어서 순진한(?) 나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래서였는지 유럽에서 보기 드물게 검문검색이 아주 철저하게 진행되었다. 더군다나 중간 중간 경찰의 심문에 걸린 외국 친구들이 잡혀 나가는 것을 보고 너무나 무서운 나머지 한숨도 잠을 못 잤다.
다음날 아침 오슬로의 기차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한여름 날씨임에도 왜 이리도 추운 것인지, 몸이 오들오들 떨리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역시 바이킹의 후예답게 사람들은 추위에는 아랑곳 않고 씩씩하기만 했다.
맨 처음 향한 곳은 조각가 바젤란의 2백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모아둔 프로그네르공원이었다.
인간의 생사와 갈등의 문제 등을 다룬 위대한 조각가인 구스타프 바젤란은 노르웨이에서도 자랑하는 위대한 인물이다.
일명 바젤란 조각공원인 이곳에는 남녀노소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높이 15미터의 대석주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곳곳에 나들이 나온 가족들도 눈에 띄었는데 조각품들은 그저 평범한 것들이 아니었다. 인도의 남녀 교합상이 무색할 정도로 좀 민망한 조각품들도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그곳을 나와서 유럽에서는 필수적으로 들르다시피 하는 국립미술관으로 향했다. 너무도 다리가 아파 버스를 타려고 했었지만 버스비가 자그마치 1천5백 원이나 되는 것이다. 심장마비로 쓰러질 뻔했다. 한국에서도 2백50원이 아까워 한두 정거장은 그냥 걸어다녔었는데 1천5백 원이라니.
시내 구경을 마치고 오슬로역으로 되돌아왔을 때가 거의 저녁 8시가 다 되었던 때였다. 하지만 대낮처럼 태양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4일 동안 연속으로 밤기차를 타고 다니는 바람에 샤워는커녕 머리도 감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1천 원 가량이나 하는 화장실에 들어가 주인의 눈치를 보며 머리를 감았다. 들키는 날에는 나뿐만 아니라 민족의 대망신이었기에 마음 졸이며 머리를 감았다. 와, 구미리내 만세, 대한민국 만만세였다.
다시 밤차를 타고 노르웨이 제2의 도시인 베르겐으로 향했다. 베르겐은 피요르드 관광의 거점으로 24시간 내내 해가 지지 않는 곳인 나르빅을 갈 수 있는 길목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부족했던 터라 나르빅까지의 행차는 불가능했다. 내가 베르겐에 가는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순전히 문학도로서의 의리(?)였다.
세계적인 희곡으로 널리 알려진 ‘인형의 집’의 무대이기도 했고 또한 그 작품의 작가인 입센의 고향이 바로 베르겐이었던 것이다.
기차 안에서 문득문득 잠이 깼었는데 아니 이거 웬 눈보라? 창 밖에서 새하얗게 춤을 추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눈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올해 여름에 첫눈을 본 셈이었다.
아침이 되어 베르겐에 도착하니 날씨가 조금 풀렸는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유명한 극작가의 고향이었다는 편견 때문일까 마을 전체가 너무도 평화스럽게 동화적이었다.
비가 오는 관계로 우산 대신 비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괴물 쳐다보는 듯 아래위로 훑어보고 지나가고 동네 개까지도 슬금슬금 나를 피하려드는 것이었다.
그냥 지나가도 이상하게 보일 텐데 알록달록한 비닐 같은 비옷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똑 외계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계속>
[구미리내의 세계 배낭여행기] 6 유럽, 그 웅대한 역사를 따라 - 바이킹의 나라 노르웨이
‘인형의 집’ 작가 입센의 고향 방문
밤열차 히피족 많아 “불안 초조”
발행일1994-01-02 [제1887호, 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