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일어난 일을 모르다니 그런 사람이 당신 말고 어디 또 있습니까? (루카 24,18-19)’
달력에 O표를 하며 엠마우스로 가는 이 ‘수도의 길목’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과 기도하고 함께 마음을 나누며 걸어왔던 은혜로운 시간을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특히 우리 학교 학생들과 내 반 아이들의 반응은 컸다. 어느 날 경태가 흥분이 되어 신문을 들고 학교에 왔다.
“수녀님, 가톨릭신문에 나왔어요”
엄마가 신문을 읽어 주셨단다.
“저도 봤어요”
“저도 신자예요”
저두요, 저두요, 아직 첫 영성체를 못한 2학년 아이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외쳐댔다. 이쯤이면 아이들의 이야기를 막을 수는 없다.
“네, 예쁘고 멋있었어요”
누가 그러니까 와-와- 환성을 지르며 축하 박수를 쳤다. 저희들 선생님이 하느님 신문(?)인 가톨릭신문에 난 것이 대단하고 자랑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어떤 내용이 제일 재미있었나요?”
아이들이 다 읽지는 않았겠지만 머릿속에 무엇이 남아있는지 약간은 궁금했다. 엑스포에 가서 수녀님들이 지구관만 뱅글뱅글 돌던 일, 올림픽 때 개나리 가지 들고 달리다가 혼났던 언니 형들, 선생님마저도 달려야 했던 일, 소말리아 어린이 돕기 바자회는 직접 자기들도 나와서 우쭐거렸고, 부처님 앞에서 성호기도를 한 언니의 행동이 재미있었고, 아직도 안 죽었어요? 는 너무 웃겼단다.
비슷하게라도 알아낸 아이들의 상품으로 초콜릿과 상본이 나오자, 이제까지 멍하니 듣고 있던 아이들까지 태도가 변했다. 어쨌든 상은 타야 하나보다.
“하늘나라 이야기예요. 예수님, 하느님 이야기예요. 예수님 말씀 잘 믿고 착하게 살라구요. 가난한 사람 돕기…” 등등 신자가 아닌 아이들도 종교시간에 배운 실력을 총동원했다.
…눈이 열리어 그분이 예수님이시다는 것을 알지 않았는가?
이제 ‘수도의 길목’을 걸어온 우리 일행은 마지막 관문에서 빵을 떼며 예수님을 알아 뵙는 순간까지 걸어왔다.
“길에서 그분이 말씀하실 때…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
수도회 창설자 메리워드가 일생의 삶으로 증거한 것처럼 예수님만이 우리 생애의 처음과 마지막에 해야 할 귀중한 언어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