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행 배를 출항하는 회사는 두 곳이 있다. 하나는 바이킹호와 하나는 실자호였다. 그러나 유레일 패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실자호를 타야만 한다.
매표소에 다다르니 벌써 많은 배낭족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실자라인은 더군다나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규모를 자랑하는 선박으로 그것을 공짜로 탈 수 있다는 것에 얼마나 감사를 했는지 모른다.
당당하게 유레일패스를 내미니 내가 잘 수 있는 침대 번호와 함께 배표를 건네주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수도인 헬싱키행은 모두 자리가 차서 안 되었고 제2의 도시인 투르크행 배를 타야만 했다는 것이다. 물론 투르크에서 헬싱키까지는 기차로 두 시간여밖에 걸리지 않았기에 어찌 보면 투르크까지 구경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행운이었다.
몇 시간씩 같은 자리에서 진을 치고 앉아 있으니 그동안 드물게 만났던 한국인들도 꽤나 눈에 띄었다. 하지만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가 않았다. 혼자만 여행을 떠나온 냥 생각하는 그들의 잘난 척도 보기 싫었고 시끌벅적 이목을 집중시키는 그들의 무리에는 더더욱 끼고 싶지가 않았다.
드디어 배에 오르니 완전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거대한 유람선 그대로가 아닌가.
배 안의 엘리베이터는 11층까지 설치가 돼있었고 수영장과 슈퍼마켓, 호화 식당과 샤워실까지 겸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침대까지 얻고 나니 기분이 들떠 있었다. 유레일패스를 가진 덕분에 이런 호화 대접을 받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았다.
배가 얼마나 컸느냐 하면, 갑판에 나와 바람 좀 쐬고 다시 들어가려 하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만 것이었다. 배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8개가량이 있었는데 이 문을 열어봐도 아니고 저 문을 열어봐도 아니고 결국에는 어떤 여행자에게 길을 물었더니 자기도 지금 찾는 중이라나. 40여분을 헤맨 끝에 겨우 내 침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새벽에 핀란드의 투르크에 도착했다. 비자가 필요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해야 할 여권 검사마저 무조건 그냥 통과 통과였다. 이건 외국에 온 건지 제주도에 온 건지 잠시 착각에 빠졌었다.
선착장 바로 옆에 있는 기차역에서 대기하고 있는 헬싱키행 기차에 올랐다. 구소련에 가까운 북구 도시라 그런지 더욱 써늘하고 춥게만 느껴졌다. 아무리 북구의 여름이라지만 가을철 겉옷을 입고도 몸이 떨리다니 이상했다. 여름에도 이러니 겨울에 여행을 왔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뻔했다.
시간이 너무도 촉박했기 때문에 기차역에 당도하자마자 뛰어가면서 시내 구경을 해야 했다.
그 중에서도 세나타 광장이라는 곳은 헬싱키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평일이라 그런지 대체로 한산했다.
그곳에서는 나들이 나온 아줌마와 남자 아기를 알게 되었다. 아기의 이름은 라우라였는데 코를 자꾸 훌쩍 거리길래 감기가 들었나보다고 했더니 아기 엄마는 그게 아니라 지금 꽃과 얘기하면서 꽃의 향기를 맡고 있는 중이라는 거다.
그 한마디로 헬싱키의 모든 것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었다. 두 살도 안 된 애기가 꽃과 대화를 한다니 말이다. 아기의 할아버지가 예전에 정원사를 하셨다는 것이다.
나도 옆에서 향기를 맡는 흉내를 내니 아이가 내 볼에다가 뽀뽀를 해주는 것이었다. 아기 엄마도 슬며시 웃어보였다.
또한 유럽에서도 가장 우아한 광장이라고 불리는 원로원 광장과 핀란드가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시벨리우스를 기념한 시벨리우스 공원 등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8월쯤이면 각종 음악회가 주를 이룬다는데 햇빛이 모자라 얼굴이 마냥 하얀 그들이 음악마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상상하니 우습기도 했다.
<계속>
[구미리내의 세계 배낭여행기] 8 유럽, 그 웅대한 역사를 따라 -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
배 안에서 길 잃고 40분간 헤매
북구 한여름 날씨 추워서 "덜덜"
발행일1994-01-23 [제1889호, 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