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개 누구와의 만남에 있어 첫 대면은 얼굴 생김새나 옷차림에 많은 비중을 두고 그 사람의 출신 성분이나 학력 등이 과연 나와 대화가 될 것인가라는 다양한 저울질을 하게 된다.
그래서 몇 분 동안 얘기를 나누다보면 때로는 너무나 성급하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빨리 대화의 마무리를 짓고 자리를 뜨기 위해 간혹 잔꾀를 부리는 경우도 있다.
너무나도 쉽게 이해타산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자기 평가 원칙에 따르기 쉽다는 것이다.
내 주제에 너 같은 녀석과 보낼 시간이 어디 있느냐는 식이다. 참으로 길가의 차만 빨리 굴러가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의 저울질 또한 너무나도 빨리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마음 한구석엔 사랑이라는 용어가 분명 맴돌고 있을 텐데 그 말마저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나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이라는 냉혹한 이기심이 가득 차 버릴 때가 있는 것이다.
교도사목을 해오면서 가장 가슴이 아픈 일은 열심히 살아보려고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일자리를 구하고자 해도 즉시 눈에 띄는 옷차림과 서투른 말솜씨 그리고 전과자라는 오명이 있기에 단 몇 초, 몇 분 만에 한 인격은 묵살되고 마는 예를 목격할 때이다.
교도소 내의 공장에서 열심히 잘살아보겠다고 기술을 연마해도 특정 기술이나 자격증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신부님, 저는 정말 사회의 쓰레기입니까?”
“신부님 눈에도 저는 가망이 없는 녀석입니까? 세상이 두렵습니다. 어느 한 곳 안주할 곳이 없는 저 자신 세상을 살아서 무엇 합니까?”
우리 신앙인이 늘 부르짖는 ‘사랑’이라는 말마디의 그 사랑은 하느님의 눈이요, 막달레나를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눈이다.
우리는 이웃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헐벗어 보이는 형제의 마음속에 깊이 호흡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생명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신앙인은 먼저 자신의 편협한 눈을 송두리째 버릴 때만 회개의 문에 들어설 것이다.